[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자신의 가치는 타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돈이 아무리 구겨지고 찢겨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정호승 시인도 자신이 묵사발이 되었던 순간까지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시를 통해 전하는 그의 다짐은 오늘도 묵사발이 되었을지 모를 누군가를 향한 위로가 된다.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2017)중 시 ‘묵사발’ 전문
정호승 시인의 새 시집에 등장하는 시다. 실패로 좌절해 자신의 가치를 저 아래 바닥까지 내려놓았다면, 하나 기억하자. 인생에 실패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더 나은 ‘자신’으로의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진실.
시인은 시집을 내놓으며 말한다. 시집의 시들은 마음이 슬프지 않을 때 쓴 시는 없었노라고. 슬픔에 문학이라는 옷을 입히면 때론 위로와 희망이 된다. 시인의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