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결승점엔 환호성만 있을뿐, 이기지 않고도 패배자 없어'... 소설가 김연수의 '달리기 예찬론'
[책속의 명문장] '결승점엔 환호성만 있을뿐, 이기지 않고도 패배자 없어'... 소설가 김연수의 '달리기 예찬론'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6.04.25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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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작가 김연수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애초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멸했다. 적어도 처음 나간 달리기 대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의 격려와 환호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앞서 말한대로 작가 김연수는 <달리기와 존재하기>라는 책을 번역했을 정도로 달리기광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는 모든 스포츠를 싫어했다. 특히 달리기란 이를 악물고 달려야만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체력장의 오래달리기, 혹은 낙오하게 되면 그로 인해 모든 소대원들이 기합을 받게 되는 산악구보 같은 것을 의미했다.

다른 누군가를 이기지 않는다면, 결국 패배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이 패배자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 그에게 스포츠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기지 않는 것은 패배를 뜻하는 것일까?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는 스물여섯 살에 백수의 서글픔을 달래려고 달리기를 시작했다. 어느덧 달리기는 그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그의 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처음 달리기 대회에 참가해 결승점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부끄러운 기록으로 뛰는 둥 마는 둥 고개를 푹 숙인 채 경기장 초입으로 접어들었다. 길 양옆으로 참가자들이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가족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꼴을 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치면서 이제 조금만 가면 된다고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그 환호를 대하자마자 내 등이 쭉 퍼지면서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느껴졌다. 누가 봤다면 곧 세계신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려는 선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달리기를 통해서 깨닫게 된 일들은 수없이 많다.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달리기를 하기에는 제일 좋은 때다, 아무리 천천히 뛴다고 해도 빨리 걷는 것보다는 더 빠르다, 앞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등을 곧추세우고 웃어야만 한다. 안 그러면 반라 차림의 일그러진 얼굴이 인터넷을 떠돌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8쪽~9쪽)

앞의 내용은 <지지 않는다는 말>(마음의숲. 2012)의 ‘작가의 말’에 소개된 내용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달리기 대회. 1등이나 승자에게만 환호하는 세태에 울림을 준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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