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과 나쁜 이별, 아픈 이별
좋은 이별과 나쁜 이별, 아픈 이별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6.01.26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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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명문장] <그토록 붉은 사랑> 림태주 지음 | 행성B잎새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좋은 이별과 나쁜 이별이 있다. 좋은 이별은 같이 헤어지고 나쁜 이별은 혼자 헤어진다. 좋은 이별은 자명한 이유가 있으나 나쁜 이별은 이유가 모호하다. 또 좋은 이별은 이별의 징후를 미리 알려 주지만 나쁜 이별은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그런데 실상 좋은 이별과 나쁜 이별은 차이가 없다. 그저 아픈 이별이 있을 뿐.” (p.216)

이별 해본 사람은 안다. 그 모습이 어떻든 이별은 슬프고 아쉽고 아프다는 걸. 스무 살의 청년에게 이별은 어떤 의미일까. 림태주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그토록 붉은 사랑>(행성B잎새. 2015) 중 ‘이별하기 좋은 날씨’라는 글이다.

“그 통보는 마치 입영영장처럼 암담하고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때 사랑도 이별도 이별 후마저도 아름다운, 그런 사랑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뚜렷한 사랑의 형식은 없었지만, 상상해둔 이별의 형식은 있었다. 죽음이 삶의 계속이듯이 이별도 사랑의 계속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이별은 잔인했다.

그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생경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왔다. 나는 아름답지 못한 이별의 몰골로 사랑을 완성할 수 없어서 절망했다. 모든 헤어지는 사랑이 그렇듯이 나의 이별도 혼자만의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너는 나보다 순수해.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순수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더 나빠질 거야.”

알 수 없는 나라의 말이었다. 알아듣기 힘든 이별 선언문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호한 ‘이별 역’에서 내렸고, 나는 혼자만의 ‘사랑 역’을 향해 계속 갔다. 나는 레일이 교차되는 간이역에 즐비하게 서 있던 미루나무들을 잊지 못한다. 미루나무는 은종처럼 바람의 잎들을 잘디잘게 부수고 흔들어 나의 사랑과 그녀의 이별을 축복했다.” (p.217)

그 후 림 시인은 자주 바닷가에 가서 술을 마셨다.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썼다. 김정호의 ‘님’을 불렀고 감정과잉의 시를 써댔다. 한참 뒤 군대를 갔고 시인이 되었고 사회인이 되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을 때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더 나중에 내가 ‘사랑 역’이라고 여기고 지나쳤던 모든 역이 조금씩 이별을 희석하는, 희미한 ‘이별 역’이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이별이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무엇이 달라졌을까. 조금 덜 아프기 위해 조금 일찍 이별을 받아들이고 조금 더 빨리 잊는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이별에는 좋은 이별도 나쁜 이별도 없다. 조금 더 멀리까지 나아간 사랑과 짧아서 많이 아쉬운 사랑이 있을 뿐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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