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였다.아무도 읽지 않는 시집처럼'
'눈이 쌓였다.아무도 읽지 않는 시집처럼'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6.01.26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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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명문장] <그토록 붉은 사랑> 림태주 지음 | 행성B잎새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집의 표지처럼 차분하게 쌓였습니다. 적설은 편지지 같아서 나무들은 꾹꾹 눌러 쓴 글자인양 박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보낸 설경을 읽다가 행간에 숨겨둔 암호들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느낌표 같기도 하고 화살표 같기도 하고 맑은 소리가 나는 음표 같기도 합니다. 아련한 귤빛 가로등이 지시하는 대로 눈길을 따라가면 당신이라는 그리움의 포구에 다다르겠지요.

답장을 보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기다림 없다고 나무랄까봐 참아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내 그리움이 호랑가시나무 열매처럼 붉어서 우체국에 갔습니다. 이제 돌이키기는 힘듭니다. 수화물 상자에 담긴 나를 기다려 주면 좋겠습니다.

우편배달부의 자전거 은륜이 더운 숨을 토하며 비탈길을 오를 때, 거친 눈보라가 지쳐 있기를 바랍니다. 봄의 주소지에 햇살의 씨앗을 고르며 당신이 여전히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서 새잎 냄새가 납니다." (p.210~p.211)

<이 미친 그리움>으로 유명한 림태주 시인이 두 번째 산문집 <그토록 붉은 사랑>(행성B잎새. 2015)에서 ‘그리운 편지1’이라는 제목으로 밤새 내린 눈을 노래했다. 함박눈 내린 아침, 호랑가시나무 열매처럼 붉은 그리움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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