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안도현의 철길 예찬 '철도처럼 평등하게, 둥글게'
[책속의 명문장] 안도현의 철길 예찬 '철도처럼 평등하게, 둥글게'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11.05 0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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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당신은 언제 기차를 처음 보았는가. 그것을 봤던 순간을 기억하는지.

<사람 사람>(신원문화사. 2015)에서 시인 안도현은 기차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섯 살 때쯤 아버지가 기차를 보자고 그를 안동역에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 그에게 기차는 오막살이 옆을 칙칙폭폭 자장가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처음 만났을 때는 그게 아니었다.

“칙칙폭폭이 아니라 꽤액, 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가던 그 시커먼 괴물.”

기차가 지나간 자리에 철길은 햇빛을 받아 퉁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누워 있었다. 위압적인 기차도 그랬지만 그 무표정한 철길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야 철길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날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철길이 웅웅웅웅, 하고 내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기다리는 기차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철길은 기차가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와 철길은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니었다. 한순간의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채는 애인 사이처럼 그 둘은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철길은 웅웅웅웅, 나에게 그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플랫폼에서 그 철길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기차에 재빨리 올라타는 데만 몰두하거나,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만 성급하게 신경을 쓰고 있으면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철길이 내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살아온 시간을 반추 할 수 있게 되고, 또 살아갈 시간에 대한 예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중략)

철길은 왜 하나가 아니고 둘인가? 길은 혼자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둘이서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다. 철길은 왜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나란히 가는가? 함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늘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닥토닥 다투지 말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말고,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철길은 왜 서로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서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두면서 가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하다.

서로 등을 돌린 뒤에 생긴 모난 거리가 아니라, 서로 그리워하는 둥근 거리 말이다.

철길을 따라가 보라. 철길은 절대로 90도 각도로 방향을 꺽지 않는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을 다 휘둘러 본 뒤에 천천히, 둥글게,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커브를 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렇게 원만한 철길을 닮아 가라.” (p.31~p.33)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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