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희곡나라]③젊은 극작가의 다채로운 글솜씨
[장정일의희곡나라]③젊은 극작가의 다채로운 글솜씨
  • 북데일리
  • 승인 2008.02.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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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안희철의 첫 희곡집 <천국보다 낯선>(평민사. 2007)은 한 작가의 다종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엿볼 수 있는 희곡집이다. 약력이 자세하지 않아 확실한 연배를 알 수는 없으나, 그는 아마 가장 젊은 극작가군에 속할 것이다. 때문에 그의 극작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여지고 있는 극작의 일면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번 희곡집은 총 6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는데 우선 단막극의 형식이 뚜렷한 〈회장님, 씻으셨습니까?>․<벽과 창>․<천국보다 낯선>․<불타는 찜질방> 중에서 앞의 한 작품을 살펴보자.

단막극은 단지 짧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고정된 장소와 최소한의 극중 시간 안에서 운용하기 때문에 단막극이다. 때문에 단막극은 하나의 극 안에 여러 스타일의 공연 양식을 뒤섞을 수 있는 용량이 부족하다. 하지만 앞서의 세 원칙도 그렇지만 후술된 기우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식도 아니며 피하지 못할 난관도 아니다.

<회장님, 씻으셨습니까?>에서는 돈 많은 회장댁에서 경리로 일하는 여자와 그녀의 남자 친구가 보물을 훔치기 위해 회장댁에 침입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떠난 줄 알았던 회장이 수의를 입은 채 안방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기겁을 한 젊은 남녀는 황급히 방을 나서려는데 회장이 벌떡 일어나, 진도씻김굿을 청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치매 상태라는 것을 눈치 챈 남녀는 보물을 얻겠다는 욕심으로, 인터넷을 뒤져서 찾은 씻김굿 차례에 따라 한바탕 굿을 한다.

밤새 서툰 굿을 주제했던 철없는 연인은 새벽이 되어 끝마무리로 대문 밖으로 나와서 옷가지를 태운다. 그리고 돌아서 다시 보물을 가지러 회장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조등(弔燈)과 함께 “박한 회장님의 발인은 오늘 오전 10시입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을 보게 된다.

그들은 한바탕 꿈을 꾼 것일까? 원래 굿은 해원을 목표로 치러지는 영혼의 통과의례며, 모든 제의가 그렇듯이 굿 또한 당사자만 아니라 거기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이 재생을 경험한다.

따라서 도둑질을 하러 왔던 한 쌍의 연인은, 회장의 아픈 과거사를 들추며 씻어내는 의례를 주제함과 함께, 궁극에는 서로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으로 맺어진다.

그러나 아쉽지만, 작품의 도입부나 진행 중에 그런 갈등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회장댁에 들어서면서부터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며 등장했다면, 서로의 사랑을 맹서하는 결말이 더욱 의미 있는 방점이 되었을 것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 된 <회장님, 씻으셨습니까?>에서 작가는 흔히 ‘극중극’으로 널리 알려진 서양극 형식을 ‘굿중극’ 또는 ‘극중굿’이라는 우리식의 연극놀이로 변신시켜, 6․25 세대의 역사적 비극과 젊은 연인들의 철부지 사랑을 복합적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굿이 가지는 초현실성과 놀이성이 극 가운데 도입되지 않았다면 작가는 회장의 과거를 자유롭게 불러내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극과 굿의 만남은 성공한 조우였다.

이번 희곡집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단막극도 아니고 그렇다 고해서 장막극도 아닌 <우리집에 왜 왔니?>다. 이 작품은 장막극이라는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는 현대극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통적인 장막극에서는 확연히 구분된 기승전결 구조와 함께, 장소의 이동이 정확히 막(幕)과 상응했다.

다시 말해 정통적인 5막극은 다섯 번의 장소 이동이 가능했고, 그 후에 나타난 3막극은 세 번의 장소 이동만 허용됐다. 물론 막이란 단순히 장소의 이동만 의미하지 않고, 한 이야기 덩어리의 완결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에, 장소가 바뀌지 않고서도 막은 내려질 수 있다.

그러나 3막극 이후의 현대극은 이야기의 절정을 향해 갈등의 구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정통적인 ‘막극(幕劇)’과는 상당히 다른 미학을 가진다.

22개의 장면으로 나열된 <우리집에 왜 왔니?>에서보듯, 막은 장면으로 대체된다. 22개의 장면으로 극이 구성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야기가 느슨하고 장소의 이동도 잦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극이 이처럼 번다스럽고 수다스러워진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시작된 표현주의 연극과 서사극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무수한 장면으로 나열․조합된 ‘정거장식 드라마’라는 양식을 통해, 막으로 구분된 부르주아 연극미학에 도전했다. 그들은 기승전결이라는 자기 충족성을 가진 부르주아 연극을 문학 취미라고 보았으며, 무수한 장면 전개를 통해 자연주의적 재현으로는 온전히 보여 줄 수 없는 복잡한 현대 사회와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려고 했다.

전형적인 ‘장극(章劇 혹은 場劇)’이라고 해야 할 <우리집에 왜 왔니?>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굉장히 충격적이고, 극적으로도 매우 완성도가 높다. 이야기가 주로 벌어지는 장소는 탈북자들의 국내적응 교육을 맡은 하나원. 원생들의 연령은 20대 초반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탈북하기 전의 신분은 물론 탈북하게 된 이유마저 각양각색이다.

그런 만큼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방법 또한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인물은 그저 성실하고, 어떤 인물은 기회주의적이 되고, 또 어떤 인물은 정신병자가 된다.

<우리집에 왜 왔니?>에 흥미를 더하는 것은 단순히 낯선 체제에 적응하려는 탈북자들의 생존본능만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남한 사회를 작동하는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이다.

계모와 이복동생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작고한 아버지가 이북에 남겨 놓고 온 어머니를 탈북 브로커를 통해 남한으로 모셔온 맏형,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데려다 주겠다면서 탈북자의 정착금을 털어가는 하나원 직원, 이복동생의 부탁을 받고 북에서 내려온 탈북자(맏형의 친모)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형사…….

표현주의가 발전시키고 서사극이 애용한 ‘정거장식 드라마’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부르주아 연극에 대한 미학적 저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양식은 비유하자면 ‘5분 대기조’라고 해야 할까? 신속한 논평을 요구하는 사회 현상에 대한 보도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요즘 집필되는 대부분의 장극은 ‘정거장식 드라마’처럼 원래의 미학적 저항과 접속하기 보다는, 대중의 볼거리에 부응한다는 혐의를 지우기 힘들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아예 그런 장극들은 자신의 기법을 빌려온 출처가 다르다. 그들은 ‘정거장식 드라마’의 정신을 이어받기 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영상적 기법’을 무자각적으로 베껴 쓴 경우다.

"탈북자 이야기로 감상적인 신파를 쓸 수도 있고, 뉴라이트 구미에 똑 맞는 ‘남한어천가’를 쓸 수도 있다. 그런 뜻에서 <우리집에 왜 왔니?>는 ‘5분 대기조’와 같은 생생한 취재력과 문제 구성이 뛰어났다. 작가는 거기다가 <회장님, 씻으셨습니까?>에서 이미 재미를 본 굿놀이를 이 작품의 말미에 다시 한 번 활용한다(남편이 무덤을 열고 나타나는 21장의 한 장면은, 좀 아니지만)."

굿놀이나 전통연희를 반복해서 도입하다 보면 자신만의 지문(指紋)을 갖게 될 뿐더러, ‘영상적 희곡쓰기(작법)’가 얼마나 얕은 수작인지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할 힘도 얻게 된다.

사족삼아 말하자면, 본 희곡집의 경우도 요즘 일반화된 ‘영상적 희곡쓰기(기법)’의 폐해에 위태롭게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막이 열리면 주인공이 객석을 향해 4쪽에 이르는 긴 독백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벽과 창>이 그렇다.

웬 모노드라마인가라고 지레 짐작을 할 때쯤에서야 “그때 이사 오던 날은 어땠는지 아세요?”라는 주인공의 물음과 함께 한 번의 암전이 있고, 비로소 과거 회상과 함께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런 구성은 극이 마칠 때까지 반복되는데, 남용되는 암전에 의해 현재와 과거가 분리되고 회상이 시작되는 이런 기법은 전혀 연극적이지 않다.

바라건대, 작가는 <천국보다 낯선> 가운데 3장에 삽입된 ‘가족자살 장면’과 같이 그야말로 아무 쓸데없는 영상 활용 욕구를 자제해야 한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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