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희곡나라]①이지훈의 ‘기우제’
[장정일의희곡나라]①이지훈의 ‘기우제’
  • 북데일리
  • 승인 2008.01.09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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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이지훈의 첫 번째 희곡집 <기우제>(평민사. 2007)를 읽었다. 책머리에 부치는 저자의 말에 의하면, 1978년 미국 유학 시절에 처음 썼던 <원: 시간의 춤>이 계기가 되어 희곡쓰기를 시작했으나 극작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다.

희곡집의 표제작인 <기우제>는 1994년에, 저자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공연되었다는 시극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지?>는 2000년에, 그리고 표제작의 속편격인 <천사, 여자에게 말을 걸다>는 2007년에 집필됐다.

그러니까 스스로 “짧고 미숙한 작품”이라고 자평하면서도 “내 희곡쓰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유학생 시절의 「원: 시간의 춤」부터 소급하자면 무려 29년만이고, 1994년 <여성신문>에서 주최한 여성문학상 희곡부문을 수상했던 「기우제」부터 꼽더라도 13년만에 나온 결실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기우제>는 매우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내용상으로는 강렬한 여성주의적 편향성을 나타내는데, 희곡집 실린 총 6편의 작품 가운데 ‘짧은 연극’으로 분류된 <원:시간의 춤>과 <마태>만이 여성주의적 편향성으로부터 약간 벗어난 경우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앞의 작품이 재생과 순환의 여성적 우주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뒤의 작품 또한 미미하나마 영성 우위의 여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금하니, 좀 더 본격적인 작품을 대상으로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

<기우제>의 여주인공은 방송활동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대학교의 연극과 교수이다. 공교롭게도 직업이 같아서 작가의 분신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여주인공은, 자신의 결혼 생활을 ‘남편의 부재’로 요약한다:

“[...] 제 남편요? 몰라요, 어딜 갔는지. 하루 종일 나가 있어요. 경조사 참석, 친구 만나기, 동료 교수들과 어울리기, 등산, 사우나, 술 마시기… 항상 집에 없죠. 오늘도 누구 결혼식이 있다고 나가더군요. 아마 지금쯤은 술이 한참 취했을 걸요? 이게 우리 부부의 휴일 모습 이죠. 나는 애들과 가사로 지치고 남편은 남성사회가 요구하는 술과 교제에 바쁘고 [...] 아, 몸이 천근처럼 무겁군요. 내일 월요일을 위해 저도 이제 쉬어야겠어요. (사이, 졸린다) 제겐 월요일 강의가 제일 힘들어요. 일요일 날 전혀 쉬지를 못하기 때문이죠. (하품을 하다가 자러가려고 일어난다. 한두 걸음 걸어 들어가다가 다시 객석을 향해) 제게 남편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 뭔 줄 아세요? 그건 부, 재, 중. (냉소적으로 웃는다) 제 결혼 생활에서 그는 항상 부,재,중이랍니다.”

가사일에서든 육아에서든 본가(=시댁)와의 관계에서든 결혼 생활 속에서 남편은 항상 부재중이다. 그리고 성생활에서 역시 남편은 여성이 바라는 성애를 옳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남자는 부부간의 성생활에서마저 가부장 질서 속에서 내재화된 정복과 지배를 관철하려고 하며, 여성에게 성적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비인간적인 섹스” 혹은 “짐승의 배설행위”로 묘사되는 그것마저도 임신과 육아를 거친 중년의 아내에게는 제대로 베풀어지지 않는다. 중년이 되면서 남편은 자신이 아내와 성생활을 하지 않는 원인이 아내에게 있다는듯이 위장하고 연기한다.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인데도 부부의 성생활이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아내가 성적 매력을 관리하지 않거나 둔감한 탓이라는 거다. 남편의 위장과 연기 앞에서 아내는 자책과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헬스클럽으로 달려간다.

‘남편의 부재’가 우리나라 결혼 생활의 문제라는 설정은 전작의 후속작인 <천사, 여자에게 말을 걸다>에서도 재론된다. 아마도 작가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창원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 ‘남쪽의 소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잘 나가는 남편들은 자신들만의 지역문화 운동 단체를 만들어 놓고 아내들은 주위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대한 두 여자의 반응:

“[...] 오늘도 늦게 들어 올기 뻔하지 뭐. 보나마나 술이 엉망이 돼서…아니면 아예 또 외박일기고…오늘이 무슨 날이라는 거 알기나 알까? 하아! (한숨을 쉰다) 문화운동 혼자서 다 하나? 예술, 좋아하시네. 분명 그 교수, 변호사니, 시인이니 하는 패거리들하고 지역문화니 지역 사랑이니 지껄이싸며 한 잔 또 한 잔이것지.”, “처음엔 저도 동참하려고 애썼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데,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는데도 행사할 때 혼자서 열심히 갔었답니다. 아마 우리 부부 관계도 그렇게 하면 개선될 거라는 숨은 희망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홍 변호사는 날 누구라고 한 번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뒷풀이 같은 데도

끼어 주지 않더군요. 그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견딜 수 없어서 결국 그만 뒀죠.”

두 작품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여주인공들의 남편들은 하나같이 고학력에다 소위 밖에서는 페미니스트인양 보이는 진보적 인사들이다. 하지만 <기우제>의 여주인공이 발가벗기는 진보주의자들의 양성 지수는 일반적인 남성들의 그것과 다름없다: “남편이 진보주의자인줄 알았어요. 결혼하고 보니 가부장제와 유교의 절대적 신봉자더군요. 게다가 지독한 술꾼이었어요. 술을 마신다는 뜻이 전 무슨 말인지 몰랐죠.”

위의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환기 시킨다. 우선은 교육받은 남성일수록 가부장제와 유교적 악습을 더 철저히 학습했을 가능성이다. 물론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 주제는 작품과는 별개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조사감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작가는 용역조사를 행하기도 전에 아주 분명한 어조로 인텔리나 고학력이 아닌 노동계층과 저학력 계층의 양성 지수와 부부애를 더 높이 친다. <기우제> 1막에서 남편의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노동을 알지 못” 하는 “아주 하얗고 깨끗한 손”을 성토하며 인용하는 박노해의 시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잔업을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이불호청을 꿰매면서/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나, 2막 4장 나오는 파출부 부부의 성애는 그래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소위 진보적 인사라거나 예술을 한다는 남자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많은 남자들이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헌납하곤 하는 음주문화에 대해서 역시 따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장시간 동안 빈번히 이루어지는 한국 남자들의 음주는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거점이면서, 강고한 가부장 질서 속에 여성이 틈입하는 것을 막는 방호벽이다.

아무리 젊은 연령층에서 여성 음주자가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남성 중심으로 위계화된 질서의 꼭대기에서, 음주는 남성들만의 특권이다. <기우제>와 <천사, 여자에게 말을 걸다>에서 남편들이 술을 마신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내용적으로 강한 여성주의적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본 희곡집은, 형식상으로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과 시나리오적 기법이 두드러진다. <기우제> 3막에서 영사되는 <리어왕>의 한 장면이나 <천사, 여자에게 말을 걸다>에 나오는 “이수민이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그 눈물 방울에 하얀 천사가 비친다.

어느새 천사가 그녀의 앞에 내려와 서있다”같은 지문 운용이 시나리오적 기법이라고 한다면, <기우제>의 주제를 받쳐주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나 <천사, 여자에게 말을 걸다>의 도입부에 나오는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이야기>,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재해석하고 있는 <조카스타>나 세리였던 마태가 개심하는 순간을 잡아낸 <마태>는 상호텍스트성의 산물이다.

영상적 희곡쓰기와 상호텍스트성의 득세는 요즘 한국 연극계에 범람하고 있는 특징들이다. 이지훈의 경우 전자에 대해서는 철저한 자의식이 있다고 보여지지 않지만, 후자는 여성주의적 편향성과 연관하여 고찰할 부분이 있다.

고전 작품일수록 가부장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상식이다. 때문에 여성주의 작가는 자연스럽게 고전 작품과 응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리어왕>과 <오이디푸스>를 상호텍스트성의 마당으로 불러내게 만들고, 가부장 질서 속에서 왜곡되거나 희생당한 웅녀․이브․허난설헌․김일엽․윤심덕․나혜석․전혜린과 같은 신화적이고 실존적인 여성을 한 자리에 모아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지?>를 쓰게 만든 원동력이다.

끝으로 작가의 여성주의적 편향성이 수렴되는 궁극은, 여성해방이나 여성 우위가 아니라, 영성과 주체성을 회복한 인간, 바로 ‘나’였다는 것을 명기해 둔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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