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이트페이퍼=정미경 기자] 책이 사라진 세상, 책이 필요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시인 정호승은 산문집 <우리가 어느 별에서>(열림원. 2015)를 통해 절대로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날은 바로 인간의 죽음의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에 따르면 책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은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찾아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책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영혼의 먹이이자 모유다.
가야산에서 열반한 성철 스님도 책이라는 모유를 통해서 큰스님이 되었다. 성철 스님의 법력이 높고 깊은 것은 일찍부터 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 등 모든 경서를 독파했고, 청소년기엔 서울총독부도서관을 찾아가 책 읽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으며, 읽을 책이 다 떨어지자 다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중앙도서관과 동경대학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혔다.
당시 수백 마지기의 땅을 팔아 불교 서적만을 사들였던 천석꾼 김병연씨는 자신이 사 모은 책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 스님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전부 물려주었다. 결국 성철 스님이 입산 출가를 결심한 것도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다가 그에게 영가대사의 <증도가> 한 권을 주었는데, 그는 그 책을 받아 읽고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 하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책은 한 인간의 일생과 영혼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가 참으로 아름답다. (중략)
나도 가끔 한 권의 책이 되고 싶다. 이른 아침 창가로 햇살이 스며들 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시집이면 더 좋겠다. 시집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책상 위에 놓여 봄햇살을 받고 싶다. 나를 넘기를 여인의 손가락과 눈빛의 향기를 마음껏 맡고 싶다." (p.160~p.161)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문득 내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