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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읽기

김상범lwhite@whitepaper.co.krl승인2015.06.16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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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읽기

1.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도덕관념들의 기원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도덕관념들에 대한 서구사상사에서 가장 정치하고 근본적인 비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최종심급은 ‘삶’=‘생명’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한 허무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니체의 이러한 비판은 시대적 소임을 다한 것 아닌가? 오늘날 모든 도덕적 진리와 관념들은 붕괴되어가고 있으며, 모든 관념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의미와 목적을 벗겨낸 ‘날 것의 삶’이 우리 시대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 『도덕의 계보학』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략)...도덕이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다음 2세기를 위해 남겨둔 100막으로 된 저 위대한 연극이며, 모든 연극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의심스러우며, 어쩌면 가장 희망에 찬 연극일지도 모른다.”(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도덕의 계보학』(연암서가, 2011),p.228)

어떻게 이러한 허무주의가 “가장 희망에 찬 연극”일 수 있는지가 내가 이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는 오늘날 '방향상실'로서의 급진적인 허무주의가 도래하는 이유가 그동안 금욕적 이상이 스스로 '붕괴'되고 '내파'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금욕적 이상이 지금까지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무주의 속에서 니체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철저한 허무주의가 ‘금욕적 이상’이 아닌 다른 이상이 지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다.

혹자는 니체를 모든 이상을 거부한 '파괴적 허무주의자'로만 파악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니체가 비판하고자 하는 '이상'은 기독교적이고 금욕적이며 초월적인 이상이다. 니체의 '삶에 대한 긍정'은 단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아니라, 삶을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이상'에 따라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라는 권유인 것이다. 이러한 ‘고귀한 이상’은 자신의 생명력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나는 이 책을 ‘모든 이상에의 회의’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에 반대한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가 니체를 단순히 ‘이성중심주의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로 보는,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견해에도 반대하는데, 이러한 반대의 논거는 독자가 텍스트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한 뒤에 제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여, 조금 있다 제시하기로 한다.

2. 얼핏 보기에 금욕적 이상은 ‘힘’과 ‘의지’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 같으나 니체는 이러한 금욕적 이상을 추동하는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초월적 ‘진리’에의 의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초월적 ‘진리’는 내재적인 ‘삶’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무(無)에 불과한 것이기에 이러한 의지는 ‘무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니체는 삶 자체가 역설적으로 ‘무의 의지’에 의해 목적과 의미가 부여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나 목적이 어떤 힘과 의지에 의해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도덕의 계보학』 제1,2,3 논문 모두를 통해서 잘 드러나 있다.

1) 제 1 논문에서 니체는 ‘좋음’이라는 언어기호의 의미가 어떻게 서로 다른 힘과 의지에 의해 다르게 부여되는지를 보여준다. ‘좋음’이라는 단어는 그것이 처음에 만들어질 때에는, 즉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를 가진 ‘주인’들이 사용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거나 자신의 탁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나, 반동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를 가진 ‘노예’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악한’ 것의 반대로서 ‘선함’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2) 또한 제 2 논문에서는 문화. 제도, 풍습, 사회적 기관의 의미나 목적이 우월한 힘과 의지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니체는 어떤 사물이나 제도등의 현재적인 ‘의미’와 ‘목적’을 분석하는 것으로 그것의 발생을 설명하는 것이 오류라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의미’와 ‘목적’은 어떠한 힘과 의지가 그것을 독점하고 있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형벌이 '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 못된 것이다. '죄'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형벌은 존재했다.

형벌은 태곳적부터, 가장 원초적인 사회관계인 채권자-채무자 사이에 존재했다. 형벌은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채권자의 분노를 발산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오늘날 '형벌'은 '죄'를 처벌한다는 구실아래서 다양한 책략과 전략과 전술의 수단이 되었다. 이처럼 형벌의 의미와 목적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힘과 의지의 다양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3) 그리고 마침내 제 3논문에서는 약자들의 ‘삶’ 자체의 의미나 목적이 ‘무의 의지’=‘진리에의 의지’에 의해 부여되어 왔다는 것이 드러난다. 약자들은 삶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데, 금욕적 이상을 추동하는 ‘무의 의지’는 이러한 고통을 ‘죄’로 해석함으로써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했다.

이렇게 제1, 2, 3 논문을 관통하는 일관된 논리와 통일성이 존재한다.

3.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와 목적은 힘과 의지에 의해 부여된다. 사실상 모든 존재자의 의미와 목적은 어떤 힘과 의지가 헤게모니를 점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존하는 어떤 것, 어떻게든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보다 우월한 힘을 지닌 것에 의해 번번이 새로운 견해로 재해석되고 새로 독점적으로 이용되어 새로운 용도로 유익하게 바뀌고 전환된다....모든 일은 하나의 제압이자 지배이며, 그리고 다시 모든 제압과 지배는 하나의 새로운 해석이자 정리인데, 이로 인해 종래의 ‘의미’와 ‘목적’이 필연적으로 모호해지거나 지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모든 목적이나 모든 효용성은 어떤 힘에의 의지가 보다 힘이 약한 것을 지배하여, 그 약한 것에 자진해서 어떤 기능의 의미를 깊이 새겼다는 표시에 불과하다”(p.101)

그리고 이러한 헤게모니의 변화에 의해 변화하는 의미와 목적의 역사가 바로 그 존재자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반동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의 승리를 통한 그러한 힘과 의지의 헤게모니 장악의 역사로 볼 수 있고 그 방식은 반동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로서의 초월적 진리에의 의지)가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로서의 생명력을 타락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제1,2,3 논문 모두에서 어떻게 내재적인 생명력이 초월적인 진리에의 의지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되어 ‘삶’이 병들게 되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1) 니체는 제 1논문에서 ‘주체’라는 환상을 비판한다. 니체는 약자들이 이러한 행위와 책임의 주체라는 환상을 통해서 강자들의 '악한 행위'를 비판해왔고, 마치 자신들의 약함과 무능력이 자기자신이 선택한 것인 듯 말해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체'라는 환상을 통해서 약자들은 자신들의 약함과 무능력함을 일종의 ‘공적’으로 만들고 이러한 무능력을 ‘미덕’(겸손, 순종 등)으로 만들며 결국 이러한 ‘미덕’의 축적이 ‘초월적인 진리’로서 ‘정의’라는 ‘이상’의 실현을 가져다준다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초월적 이상이 출현한다. 니체는 제 1논문의 §14에서 이와 같은 이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초월적 진리’이자 ‘이상’으로서의 ‘정의’에의 의지가 그 자체로 병든 것이며 병든 자들을 옹호하는 것이고 사실상 사제에 의해 인간을 길들이는 데에 이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무능력과 병듦을 옹호하는 것은 강한 것을 억제되어야 하는, 더 나아가 ‘미덕’에 의해 '교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사제의 권력을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초월적 이상이 ‘길들여진 인간’, 무능력하고 병든 ‘평범한 인간’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해 왔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간에게서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 ‘길들여진 인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달갑지 않은 인간이 벌써 자신을 목표이자 정점으로, 역사의 의미로, ‘보다 높은’ 인간으로 느낄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p.51)

2) 또한 니체는 제 2 논문을 통해서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양심의 가책은 외부로 향하는 공격충동이 국가장치 속에서 억압되고 억제되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됨으로써 생겨났다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죄의식이 신에 대한 상상적인 채무의식이 도덕화됨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에 인간이 갇히게 됨으로써 탄생한, 자신을 공격하고 괴롭히는 힘으로서의 ‘양심의 가책’이, 신에 대한 채무감정으로부터 발전한 신에 대한 죄책감과 결합하게 됨으로써, 이러한 ‘양심의 가책’에 의한 자기 고문이 “소름끼칠 만치 가혹하고 준엄하게”(p.123)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신에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러한 생각이 그에게 고문의 도구가 된다.”(같은 곳)

이에 따라 인간 내면의 ‘야수성’은 그 자체로 ‘죄’가 되고 인간은 이러한 '야수성'을 완전히 극복한 금욕적인 ‘신의 이상’에 비추어 자신의 “절대적 무가치함을 확인”(p.124)함으로써 자신을 공격하게 된다. 여기서도 역시 초월적 이상에의 의지가 인간의 생명력을 타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명력에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3) 니체는 역시 제 3논문에서도 삶의 중심을 초월적 피안의 세계에 두는 ‘금욕적 이상’이 삶을 얼마나 병들게 해왔는지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니체는 사제들은 이러한 금욕적 이상을 통해서 권력을 차지해왔으며, 이러한 초월적 이상에 바탕을 둔 사제적인 권력은 인간의 생명력 자체와 이러한 생명력의 위대한 생산물들을 파괴하고 타락시켰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금욕적 사제는 자신이 지배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정신적 건강을 망쳐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예술과 문학의 취향도 망쳐놓았다....(중략)...금욕적 이상은 건강과 취향만 망쳐놓은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것도 망쳐놓았다.”(pp.203~206)

이렇게 본다면 복잡한 논리로 구성된 이 책은 매우 체계적이며 일관적이고 통일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이 책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로서 단순히 '도덕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이미지를 이 책에 덧씌우는 것이다. 오히려 니체의 비판은 '초월적 이념'을 비판하였으나 그것을 이성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만드는 칸트적 비판을 더욱 급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비판은 단순한 낭만주의적 비판이 아니라 이성 자체에 의한 이성 자체의 비판을 급진화하여 이성을 '내파'시키는 '극대 합리주의적' 비판인 것이다.

4. 그런데 왜 니체는 이와 같은 급진적인 비판을 시도하는 것인가? 니체는 왜 이미 니체의 시대부터 붕괴되어가고 있는 ‘초월적 이상’=‘금욕적 이상’의 탄생과 그러한 초월적 이상에 의한 생명력의 타락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초월적 이상이 인위적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소멸될 이상이라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러한 초월적 이상의 지배와 착취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와 착취에 맞서는 ‘고귀한 이상’의 생명력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력에 의해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라고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역설적으로 초월적 이상은 그것이 병들게 만들 생명력, 즉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니체는 초월적 이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으로서의 ‘원한’이 그 외부에 존재하는 적극적인 생명력이 있어야 존재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노예 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이처럼 가치를 정하는 시선을 바꾸는 것, 이렇게 시선을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바깥을 향하는 것이 사실 원한에 속한다. 즉 노예도덕이 생기기 위해서는 언제나 반대세계, 외부세계가 필요하다.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노예도덕이 어쨌든 행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 행동은 근본적으로 반동이다.”(p.43, 강조는 인용자)

뿐만 아니라 니체는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초월적 이상’의 반동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뿐만 아니라 ‘고귀한 이상’의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힘들간의 다툼이 존재해왔다고, 즉 ‘유태’와 ‘로마’의 대립이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인은 강자이며 고귀한 자이다. 그들보다 강하고 고귀한 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사람들은 그런 존재가 있을 거라고 꿈꾸어 본적도 없었다.”(pp64~65)라는 니체의 문장을 만나게 된다.

니체의 ‘고귀한 이상’은 니체 자신이 그것이 ‘소수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며, 귀족정이나 군주정을 암시하고 있으나, 『로마사 논고』의 마키아벨리의 말대로 로마인 개개인과 로마사회 전체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의 정치체제가 귀족정이나 군주정이 아니라 ‘공화정’이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명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은 마키아벨리적인 ‘공화주의’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인과 로마공화국 자체가 그토록 강력했던 이유로 원로원과 인민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갈등하면서 이러한 갈등의 에너지를 공공의 발전을 위해 생산적으로 '승화'시키고, 결국 이러한 대립 속에서 원로원이 배타적 권력을 가지지 않고 인민에게 권력을 개방함으로써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개발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개개인의 생명력 혹은 삶의 활력을 침식하는 부패가 "불평등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쓰고 있으며, 개혁가는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평등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안선재 옮김, 『로마사논고』(한길사, 2003),pp.85~97,pp.140~141 참조)

어찌 되었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니체가 허무주의 시대에 ‘희망’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로마적인’ ‘고귀한’ 이상은 완전히 사리지지 않았기 때문에, ‘금욕주의적 이상’의 붕괴로서의 허무주의의 도래는 이러한 ‘고귀한 이상’이 승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니체는 ‘금욕적 이상’이 필연적으로 붕괴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먼저 ‘금욕적 이상’의 화신으로서 종교가 쇠퇴하는데, 왜냐하면 금욕적 이상이 길러온 지적·도덕적 양심과 종교적 교리는 서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욕적 이상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금욕적인 도덕도 붕괴하는데, 왜냐하면 역시 금욕적 이상이 길러온 지적인 성실성이 이러한 도덕에 담긴 의지는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도덕이 얼마나 삶을 왜곡하는지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해석을 배제한 객관적 진실’에 대한 의지로서의 지적인 성실성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름으로써 니체가 금욕적 이상의 가장 세련된 형태라고 부르는 실증주의적인 ‘근대학문’조차도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금욕적 이상의 필연적 붕괴를 우리는 고귀한 이상이 승리하는 계기로 만듦과 동시에 이러한 고귀한 이상의 승리로서의 생명력의 증대가 ‘귀족주의’나 ‘제왕주의’가 아니라 마키아벨리적인 ‘공화주의’를 통해서 최적화될 수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공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공화주의는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권력과정을 만들어내고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개인과 사회가 '부패'하지 않고 '삶의 활력'을 더 강력하게 만들려면, 니체의 말대로 각각의 개인들이 '평균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여 특이성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주장대로 이러한 특이성들 사이에 평등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귀한 이상의 승리 속에서, 즉 강화된 생명력 속에서 인간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반응적인 힘과 부정적인 의지의 상징인 ‘인간’ 자체를 극복하여 ‘초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모든 존재자의 의미와 목적은 힘과 의지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이러한 고귀한 이상의 승리 속에서 적극적인 힘과 긍정적인 의지의 승리는 삶과 세계에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삶과 세계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어린 아이처럼 끝없는 창조와 유희의 대상으로 변환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범  white@white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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