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새해 첫날 햇빛의 시간을 송곳니로...
[책속의 명문장] 새해 첫날 햇빛의 시간을 송곳니로...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5.01.13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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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이어령>중에서

[북데일리] 한 달 후면 구정이다. 우리는 떡국을 먹고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다. 새해 첫날 쏟아지는 햇빛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많은 이들은 이미 1월 1일에 새롭게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많은 결심들을 했을 터이다.

<읽고 싶은 이어령>(여백. 2014)은 ‘한국의 대표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이어령 선생의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펴낸 것이 아니다. 2013년에 작고한 최인호 작가가 이 선생의 글들을 선별해서 만들었다. 저자는 '햇살을 씹어라’는 글에서 새해를 맞이해 시간에 먹히지 말고 삼키라고 한다. 다소 나태해진 마음에 일침을 가하는 듯 하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한다. ‘먹는다’는 그 표현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많은 암시를 읽을 수 있다.

희랍신화에 의하면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그리고 모든 생물은 시간 속에서 멸해 간다. 생명 없는 물체까지도 시간 속에서는 그 빛과 형태를 잃고 무너져가는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무쇠도 시간의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이겨낼 수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먹히고 만다.

그런데 한국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간은 시간에게 먹히는 존재가 아니라 거꾸로 시간을 먹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탐스러운 열매가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우선 그것을 본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손을 들어 그것을 딴다.

시각은 촉각의 세계를 옮겨온다. 그러나 손 안에 있는 열매를 만지는 것만으로는 그 아쉬움이 풀릴 수 없다. 깨무는 것이다. 이미 열매는 내 앞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촉각은 미각의 세계로 바뀐다. 시간을 먹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만지던 그 바깥세계를, 깨물고 맛보는 내 몸 안의 세계로 끌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떡국을 먹듯이 새해 새날의 시간들, 그 미지의 세계를 이로 깨문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그 시간들을 맛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 먹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떡국처럼 먹어버릴 때, 이미 그것은 내 신선한 혈관 속의 한 핏방울이 된다.

당신도 시간에 먹혀서는 안 된다. 시간을 꿈의 이로, 의지의 이로 깨물어야 한다. 삼켜야 한다. 혓바닥으로 새로운 시간들을 맞이해야 한다. ‘먹는다’는 말, 야생적인 이빨의 언어로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새해 첫날 새벽에 쏟아지는 그 찬란한 햇빛의 시간을 눈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송곳니로 씹어야 한다.“ (p.144~p.145)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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