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관계'란 수박씨, 툭 툭 뱉어라
'불편한 관계'란 수박씨, 툭 툭 뱉어라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5.07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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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들

 

[북데일리] 파란 하늘에 크고 작은 뭉게구름이 떠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얇은 커튼이 살랑거린다. 단단한 녹색 껍질 속에 빨갛게 익은 수박 반 덩어리가 놓여있다. 흡사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퍼내듯 작은 스푼이 반쯤 들어가 있다. 시원해 보이는 표지 그림이다. 그런데 수박씨들은 다 어디로 갔지? 까만 글씨의 제목에 콕콕 붙어있다. 수.박.

 <수박>(작가정신. 2014)은 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은조의 첫 소설집이다. 책에는 그녀의 등단작인 <우리들의 한글 나라>와 함께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녀는 등단작을 통해 “수준급의 구성과 문체, 안정적인 구도로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에는 표지처럼 아주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첫 번째 소설 <전원주택>. 주인공 ‘나’는 오랜 소망이었던 전원주택으로 이 년 전 이사했다. 이후 나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대출금이 빠져나가 월급 통장이 홀쭉해져도 형편은 곧 나아질 거라 믿었다.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것이 아니라 크루아상과 커피, 새싹비빔밥, 퐁뒤와 와인을 마시는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봄에는 꽃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햇살로 지은 밥을 먹고, 가을에는 낙엽 이불을 덮고 겨울에는 눈꽃 모자를 쓰리라. 내 소망은 단순했다.” (p.17)

 하지만 애초 생각과 달리 친정 식구들, 시부모의 형제들, 친정부모의 형제들까지 연달아 찾아와 텃밭의 채소들을 한 보따리씩 들고 떠나는 일상이 반복된다. 손님이 오지 않는 날에는 집안일과 텃밭을 가꾸는 일로 녹초가 된다. 한번 초대했던 방문객들은 계절이 바뀌면 천연스럽게 찾아와 머물다 간다. 그 중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 ‘강’은 집들이에 온 뒤로 주말 아침마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국 남편은 강을 돌려보내려다 우발적인 사고를 내고 만다.

 이 소설은 ‘소통의 부재와 단절’이 어떤 비극을 불러 올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이 끝날 때 까지 주인공 부부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저들 부부는 왜 진작 약게 사람들과의 힘든 ‘관계'를 정리하지 못했을까.

 또한 표제작 <수박>도 마찬가지다. 넉넉지 못한 생활 형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난주’.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안락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러나 그것조차 녹록지 않다. 어느 날 불쑥 한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오빠네 부부. 오빠는 문제 덩어리다. 그런 오빠로 인해 회사에서도 난처한 입장에 처한 난주는 무작정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시골에 간다. 그녀의 손엔 수박 한 덩어리가 들려 있다. 사찰 앞 노점에서 주인 노파와 함께 그 수박을 먹는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은 듯한 노파는 말한다.

 "“수박씨는 꼭 뱉어내야 돼. 가슴에 담고 있으면 안에서 수박이 열린다고. 씨가 있다고 수박을 안 먹으면 미련한 거지. 씨앗은 뱉으면 돼, 그냥 툭, 툭… ….”

 노파는 혀를 말아 씨를 뱉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난주도 노파를 따라 바닥에 씨를 뱉었다. 무엇인가 가슴에서 방울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난주는 씨를 뱉기 위해 수박을 베어 문 것처럼 바닥에 툭, 툭 씨를 뱉었다." (p.91)

 막걸리에 파전을 먹고 잠이 든 난주의 머리에 목침을 디밀어주는 노파. 그녀가 깊은 낮잠에서 깨고 나면 현실의 골치 아픈 일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 외 <바람은 알고 있지>에서 ‘혜리’가 꿈꾸는 것 또한 안락한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소복하고 평범한 삶이다. 그녀의 남자친구 ‘상우’가 말하는 꿈도 ‘최선의 생존, 내가 번 돈으로 사는 세상’일 뿐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삶과 욕망, 관계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녀는 평범한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좀 더 야멸차게 살라는 깨우침을 준다. 더불어 그런 생각으로 뾰족해진 마음을 다독다독 두드려주기도 한다. 가끔은 수박 덩어리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관계’들을 수박씨 버리듯 툭 툭 털어내도 좋지 않을까.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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