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 마리 개미 같았다
그녀는 한 마리 개미 같았다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3.07.22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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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정든 사진첩 같은 류소영 소설

[북데일리] “류소영의 소설집은 낡고 정든 사진첩을 닮았다. 낡은 사진첩을 펼쳐보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지나가 버린 추억, 젊음, 빛바랜 시간들이 사진첩의 갈피를 넘기는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을 콕콕 찌른다.” - 이소연 (문학평론가)

<개미, 내 가여운 개미>(작가정신. 2013)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원가 결핍돼 있는 사람들이다. 책에는 <물소리>, <기록>, <윤미와 춤을> 등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 <개미, 내 가여운 개미>는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폭식증을 앓고 있는 여자 이야기다. 형수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녀, ‘신주연’은 나와 사돈지간이다. 형의 집에 얹혀살던 나는 그녀를 조금 사랑했던 것도 같다. 어느 날 새벽 형으로부터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폭식증……. 남몰래 무엇인가 빠르게 입속으로 구겨 넣기. 우리가 함께한 이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녀는 계속 그런 슬프고 아픈 모양새를 하고 있었고, 나는 계속 세월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은 청춘에 먹히는 기분이었다.” (p46)

어릴 적 그녀는 개미를 좋아해서 집 벽을 타고 줄지어 귀엽게 행진하는 개미들을 한 마리씩 입에 쏙쏙 집어넣곤 했다. 어느 날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벼락이라도 맞은 얼굴로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짐승’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그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회복되지 않았고, 늘 바깥을 떠돌며 희미한 유령처럼 존재하던 그녀는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 것.

“세상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철저히 무색무취하고자 했으며, 언제나 묵묵하게 자기 속도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녀는 한 마리 개미처럼 느껴졌다.” (p59)

<또 밤이 오면>은 예순 네 살 시어머니의 가출로 남겨진 가족들이 속수무책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무엇이 서운했을까, 무엇이 불만이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며느리인 나는 가출 이유를 찾기 위해 온갖 기억을 다 되짚어본다. 비로소 육 년째 같이 살았던 시어머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가출한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된다.

“어둠이 내린다. 남편은 또 늦을 것이고 시아버지는 또 밥을 반 공기만 비우시고는 서둘러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또 밤이 오면, 우리는 집 안의 모든 불을 환하게 밝히고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서로를 괴롭히는 닦달과 비난과 공격, 그 익숙한 노래들을 일제히 합창한 다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그저 일 절만 깔끔하게 부른 다음. 가출의 원인이 적어도 나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만큼만 부른 다음.” (p94~p95)

<옷 잘 입는 여자>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옷차림을 강박적으로 고수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윤세연’은 옷 잘 입는 여자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그녀는 늘 남들보다 한발 앞서 유행하는 옷을 입는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그녀의 옷차림은 가장 평범한 스타일이 돼 버린다. 모두가 그녀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유행을 따르는 거예요. 준희 씨 말대로 개도 비웃을 일이지만 저한텐 심각한 현실이죠.“ (p116)

교복 자율화 세대인 그녀는 사촌 언니들로부터 물려 입는 옷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처음으로 가난이 원망스러웠고, 어른이 돼서는 ‘옷 잘입는 여자’가 된 것.

이 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와 가족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개인들이다. 그들은 그저 대중 속의 하나일 뿐, 사실 개미나 유령처럼 ‘희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죽어버리거나, 사라지거나, 쇼킹한 일을 벌일 때에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게 된다. 소설은 우리의 일상을 보듯 술술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비오는 날, 차분하게 읽기에 좋을 책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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