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진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의 향연
푸진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의 향연
  • 북데일리
  • 승인 2007.09.1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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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남미 문학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는 가볍고 편안하게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이는 일부 일본 소설의 가벼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 중간에 녹아있는 유머스러움이나 특유의 낙천적인 분위기는 책을 읽는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킵니다. 힘이 빳빳하게 들어간 어깨를 주물러주고, 은연중에 처진 입매를 올려주지요. 바르가스 요사도 그러하지만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더욱 그러합니다.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민음사. 2004) 보셨나요? 아니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영화화한 <일 포스티노>(Il Postino [The Postman], 1994)는요? 워낙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둘 중 하나라도 보신 분들, 꽤 계실 것 같습니다. 온통 하늘색과 흰색을 칠해놓은 듯한 풍광. 잠시만 떠올려도 마음이 설렙니다. 이를 탄생시킨 이가 바로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이지요.

아시겠지만, 칠레는 아직 안정화되지 않았지만, 발전 가능성이 많은 나라입니다. 1973년부터 17년간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에 시달려왔고 아직까지도 그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나라예요. 군부 독재가 시작되던 해부터 스카르메타는 자발적으로 칠레를 떠나 십 수 년이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칠레 문학의 대중화에 힘쓰는 작가입니다.

2003년 스페인 플라네타상 수상작인 <빅토리아의 발레>(문학동네. 2006)입니다. 우연히 들렀던 서점에서 발견하고 데려온 책이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스카르메타가 특유의 푸진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로 파노라마처럼 펼쳐내는 480p 분량의 맛깔 나는 소설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저처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인상 깊게 읽으셨던 분들은 꼭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스카르메타는 따뜻한 시선을 가진 작가입니다. 비루하고 천한 밑바닥 인생도 그가 보듬으면 온기가 돌고 뭉클한 것이 됩니다. 꾀죄죄하고 보잘 것 없는 삶도 용케 작은 보석 같은 부분을 발견해 빛나게 만듭니다. 게다가 등장하는 인물들은 치명적인 결점을 여러 개나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이어서 삶이 고단한 독자들은 오히려 그들에게서 고마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의 발레>의 배경은 ‘현재’ 칠레의 뒷골목이며 다양한 밑바닥 인간 군상이 등장합니다. 도둑, 창녀, 그리고 살인범까지. 읽으면서 막연히 적어도 몇 십 년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읽었는데, 9.11이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언급도 있어 화들짝 놀랐습니다. 정말 칠레의 ‘현재’ 모습이에요. 생생하고 밝으며 거침이 없습니다.

주인공 앙헬은 나락까지 떨어져 본,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고단한 청년입니다. 절도죄로 감옥에도 들어갔다 왔고 감옥에서도 치욕스런 일을 당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 청년이 군부독재의 상처를 안고 사는 빅토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아닌, 국립극장 발레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빅토리아의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나 그녀의 안위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고 사랑을 택하는 것이 파격이라면, 잇몸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 아닐까요? 남루하고 불운하지만 결코 핑계 대는 법이 없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어서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인 앙헬의 삶의 모습은 이기적인 우리네 삶과 대비되어 빛을 발합니다.

참, <빅토리아의 발레>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통속적인 탱고 가사와 시를 나란히 놓기도 하는 작가라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잡탕의 미학’이라고 칭한다는데, 카버 단편 인용도 그 일환이 아닌가합니다. ‘노란 장미 세 송이’라는 단편인데, 구할 수가 없네요. 아무튼 아는 사람 만난 양, 괜스레 더 반가웠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발끝을 들고 살짝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칠레는 한겨울의 정오이고 한국은 한밤중일 테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가 기쁘게 사라져버린 순간을 상상합니다. (중략)

우리 사이에 넓은 바다와 언어의 장벽이 가로놓여 있어도, 이 세상 모든 인간의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며 위대한 모험들은 닮은꼴이리라 확신합니다. (4-5p)

스카르메타가 한국 독자에게 드리는 글의 일부입니다. 삶이 고단하신 분들, 차라리 잠시 문제에서 벗어나 스카르메타의 소설을 읽어보시면 오히려 해결 방법이 더 빨리 떠오르지 않을까요? 건투하시기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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