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쾌락과 욕망의 존재, 고독한 현대인
오직 쾌락과 욕망의 존재, 고독한 현대인
  • 북데일리
  • 승인 2007.08.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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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소설마다 여러 가지 다른 흔적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은 눈 위에 깨끗한 발자국처럼 남기도 하고, 뱀이 온몸을 뒤틀며 지나간 흔적처럼 흐트러지고 깔깔한 모래 같은 느낌이 남기도 합니다. 또, 뒤통수의 기계총 같기도 해서 계속 신경이 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소설은 뒤로 세게 넘어진 것처럼 엉덩이가 얼얼하기도 하죠.

이번 주 소개해드릴 책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열린책들. 2003)입니다. 이 소설은 무거운 납덩어리가 마음에 매달려있어서 눌린 자국이 꽤 오래 갔습니다. 우엘벡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거의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저도 엄지손가락이 두 개인 것이 못내 아쉬운데요. 서구 사회의 병폐를 정확히 진단하고, 이를 날카롭게 풀어내는 역량이 대단해 감탄했던 작가입니다.

사실, 저는 그의 세 번째 소설 <플랫폼>(문학동네. 2002)을 더 좋아하지만, 우엘벡을 좋아하는 다수는 <소립자>(열린책들. 2003)를 추천하시더군요. <오래된 정원>의 임상수 감독도 우엘벡을 무지 좋아한다는 기사를 본 것 같습니다. 읽을 때 몸을 휘감는 힘이 좀 더 강렬해 그런가 봅니다.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직 우엘벡의 소설을 접하지 못하신 분들은 <소립자>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우엘벡은 프랑스에서 논란거리가 많았던 유명작가입니다. 그가 <소립자>를 발표하고 나서, 대단히 앞서가는 사실적이고 위대한 소설이 <소립자>라고 칭송을 받았는가 하면, 이슬람 차별주의자의 형편없는 소설이다, 소설의 인물들이 주장하는 바가 위험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등 가차 없는 혹평이 줄을 잇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콩쿠르 상 후보에서 제외되기까지 했었죠.

우엘벡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논란이 극심하지만, 그만큼 훌륭한 작가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고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정작 작가는 일찌감치 프랑스를 떠나 아일랜드 어딘가에서 다음 소설을 구상하거나 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군요.

소설은 자유분방한 히피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이부(異父)형제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의 등가물로 보았는데 형제들 역시 욕망의 결여로 인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아들들을 철저히 무관심 속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의 붕괴된 가족의 모습 역시 사실적으로 드러나고 있죠.

동생인 미셸은 조용하고 성실하며 훌륭한 분자 생물학자였지만 철저히 고립된 인물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거부하고, 형인 브뤼노는 끊임없이 성(性)에 탐닉하지만 진실한 사랑을 찾는데 결국은 실패하고 정신병원에서 영영 욕망을 거세당하고 마는 인물입니다.

우엘벡은 <소립자>를 통해서 서구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줍니다. 남은 것은 욕망과 쾌락뿐인 서구 사회의 모습이 대조적인 두 형제의 모습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는 우엘벡의 다른 작품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랫폼>의 주인공 역시 경제적으로는 풍족하나 사랑하거나 소통하지 못하며 사는 인물이고, 급기야 태국으로 욕망을 채우러 여행을 떠나는 인물입니다.

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있다. 자기의 남아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 (267p)

우엘벡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정치적 올바름도 문제되지 않고 오직 육체적인 쾌락과 욕망만이 존재하는 고독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투사한 것입니다. 늙음을 견딜 수 없어 죽는 날까지 육체적인 쇠락과 싸워야하며,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나 그 방법을 찾지 못해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현대인들의 모습 말이죠. 작가는 그나마 이러한 현대인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가치가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일 것이라 냉랭하게 이야기합니다.

또한 가공의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시켜 마치 실제 있었던 일처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는 것도 <소립자>의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사르트르나 오귀스트 꽁트,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 등. 그들의 사상과 이론은 가공의 서사와 잘 버무려져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사전에 의하면 ‘소립자’란, ‘현대 물리학에서, 물질 또는 장(場)을 구성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설정된 작은 입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광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양전자 따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소립자들이 여러 상호 작용을 통하여 서로 성질을 달리하게 되듯, ’관계‘와 ’소통‘의 최소단위로서의 개개인이 소설에서 의미하는 ’소립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진정한 ’관계‘와 ’소통‘에 대한 작가의 입장일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세대, 가치관은 전 세대를 부정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세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엘벡의 소설이 극렬한 논란을 불러왔듯 소설이 지향하는 것 또한 더 나은 곳으로 발을 뻗기 위한 예비 단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소립자’로서 현대인의 존립 근거가 아닐까요?

우리는 다원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대담론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미시적이고 점차 파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속도의 차이지 서구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우엘벡은 미시를 통해 거시를 보여줍니다. 미시와 거시를 아우르는 작가입니다. 혹자는 ‘거시를 얘기하나, 체계가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비평가들보다는 읽고 해석하는 독자들의 몫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엘벡의 책은 두 번째 소설인 <소립자>를 비롯해 첫 번째 소설인 <투쟁영역의 확장>(열린책들. 2003), 세 번째 소설인 <플랫폼>(문학동네. 2002)까지 이렇게 세 권이 나와 있습니다. <소립자>에 감탄하신 분들은, 다른 작품들도 꼭 접해보시라고 권합니다. 아, 참 작년에 부산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작품 중에 <소립자>가 있더군요. 책의 내용과 좀 다르긴 하지만, 브뤼노 역의 모리츠 블라입트로이의 연기가 압권이니 챙겨보시길 바랍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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