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 면밀한 잔소리꾼의 `책벌레` 이야기
주도 면밀한 잔소리꾼의 `책벌레` 이야기
  • 북데일리
  • 승인 2007.08.0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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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하나가 마들렌을 먹으며 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작품은 “저자가 독자에게 건네주는 일종의 광학적 도구일 뿐이다. 저자는 독자가 평소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어떤 것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그 도구를 내미는 것이다.” (115p)

[북데일리] 이 문장을 읽고 벌써 슬며시 웃음을 지은 분들, 계실 것입니다. 여기서 ‘마들렌을 먹는 프랑스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모 드라마에서 빠띠셰르가 직업인, 촌스러운 이름의 한 여인이 프랑스 과자 마들렌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던 장면을 기억하세요? 네, ‘마들렌을 먹는 프랑스인’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국일미디어. 1998)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작가의 혜안에 감탄해 이를 새길라치면, 아무리 봐도 이전에 어디선가 봤던 문장인 것 같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짐작했던 그 유명한 이가 한 말이 맞다는 확신이 들면 재미는 배가 됩니다. 하지만, 맴돌 뿐,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불친절함에 ‘그 양반 거 참 고약하네’라는 생각에 약이 오르기도 하지요.

세상에는 책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책벌레도 많습니다. 볼테르는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가치의 절반은 독자가 창조한다‘라고 했고, 저 역시 그 말을 충실히 따르는 간서치(看書癡) 중 하나입니다. 이번 주 제가 소개해 드릴 소설은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문학동네. 2002)로,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유쾌하여 여름밤에 딱 어울리는 소설입니다.

후이징은 아주 박식하며 날카로운 데다가 재미있기까지 한 작가입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말이 자칫 후이징의 책을 텍스트의 ‘조합’ 정도로 여기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으니 의구심을 거두고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책벌레>는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짠 옷과 같습니다. 부드러운 옷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거친 느낌도 아닙니다. 도톰하고 약간은 까실까실한 옷감을 매만지는 기분입니다. 책이 좋아 책을 얻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티니우스의 이야기와 책에 삼켜진 남자, 라인홀트의 이야기, 그리고 아홉 개의 양탄자(Text)가 세 가지 색깔을 내며 하나의 이야기로 짜여져 있습니다.

특히 아홉 장의 양탄자는 후이징의 독서에 대한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자 독서의 문화사가 드러나 있는 부분입니다. 칸트, 벤야민, 롤랑 바르트,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카프카 등 수많은 대가들의 말을 빌려 우매한 비평가들이나 독자들을 교묘하게 비틀고 꼬아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앞장 뒷장을 왔다 갔다 하며 정신없이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후이징은 주도면밀한 잔소리꾼입니다. 자신은 <책벌레>라는 텍스트를 그리 치밀하고 촘촘하게 짜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독자가 텍스트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잔소리를 해댑니다. 이야기가 조금 심각해진다 싶으면, 어느새 독자의 귓전에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듣다보면, 발상의 신선함이 재미있기도 하고, 번득이는 재치에 감탄하기도 하며, 좀 오래 안한다 싶으면 이상히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저 작가가 만든 옷을 입고 즐겁게 하나가 된다면 괜찮은 독서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제 책상 앞 책꽂이에는 <책벌레>(문학동네. 2002)와 플로베르의 <애서광이야기>(범우사. 2004), 알폰스 쉬바이게르트의 <책>(책. 1991)이 나란히 꽂혀있습니다. 모두 질리는 책벌레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놀라움과 재미도 있겠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니, 접해보셔도 좋겠습니다.

헤세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책은 없다. 책은 은밀하게 자신을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책벌레>를 통해 제가 애서가와 장서광 사이의 어느 곳에 위치해있는지 살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독서방법과 책읽기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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