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34년 하늘에 별들이 사라지다
서기 2034년 하늘에 별들이 사라지다
  • 북데일리
  • 승인 2007.08.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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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가까운 미래. 양자컴퓨터와 나노기술이 일상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된다. 정보의 흐름이 기계를 통하지 않고 대뇌로 직접 접속된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불편한 감정은 버튼 하나로 삭제된다.

2034년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버블이 지구를 덮어버린다. 첫 번째 버블세대로 등장하는 사립탐정 . 그가 정신병원에서 사라진 환자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면서 혼란이 시작된다.

이번에 소개할 그렉 이건의 <쿼런틴>(행복한책읽기. 2003)의 줄거리다. 이 책은 미국에서 1992년에 발표되었다. 엄밀한 과학적 지식으로 전문가들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다세계 해석, 양자역학을 소설의 소재로 접목하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소설이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소설의 중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양자역학은 SF Mania 에게도 혼란을 겪을 정도로 난해하다. 소설이 아닌 저자의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주인공인 포콰이 의 대화를 통해 소설의 분위기를 느껴보자.

“양자역학의 관측 문제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관해서는?” (포콰이) “물론 들어봤습니다.” (닉)

“흠,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 관측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예요…… 양자역학은 이들 실험의 반에서는 고양이가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반에서는 고양이가 살아 있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예측해요…… (포콰이) ”그럼……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닉)

“…… 전문용어로 말하면, 관측한다는 행위가, 각기 다른 가능성을 대표하는 두 개의 파동함수의 혼합을 단 한가지의 가능성만을 대표하는 ‘순수한’ 파동, 그러니까 고유상태(eigenstate)라고 불리는 것으로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관측 행위는 왜 그렇게 특별한 것일까요? 왜 어떤 관측 장치가 가능성들이 혼합된 상태를 오직 한 가지 상태로 수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포콰이)

위의 대화는 닐스 보어로 대표되는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관측행위를 미시영역에서 거시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면서 대뇌스캔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신경뉴런의 재배선까지 가능해진 인간의 뇌 안에서 현실의 수많은 버전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력 넘치는 필체로 기술한다.

기계의 지배, 자율성 선택의 기로

소설에서 주인공인 은 테러집단에 의해 사랑하는 아내 카렌을 잃게 된다. 하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나노기계의 도움으로 슬픔이나 증오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물리적으로 장착된 신경모드 칩에 의해 자율성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펴보자.

“책상에 앉아서 인생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면서 과거의 절대로 바뀌지 않을 고정된 행위에 대해서 그 순간에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후회와 번민을 하고, 알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런 사유와 고민을 통해 지금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 이것보다는 나노웨어 가게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신경모드 칩을 대뇌스캔을 통해 장착하기만 하면 모든 고민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소설 속에서 이러한 주인공의 생각을 바꾸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앙상블 에서 실험대상자인 포콰이에게서 알게 된 조작모드확산수축을 실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현실을 고민하게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겨놓았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은 확산시 수백억에 달하는 버전 중에서 거의 실현불가능한 극소수의 버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계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 자율성에 대한 확신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킨다.

만일 지금 나의 모습이 방금 전 또는 몇 십 년 전 나 자신의 무한한 확산의 결과이고,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최선인 하나의 현실로 수축한 것이라면 이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일상의 귀속이라고 해야 할까.

그렉 이건은 사소한 일상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아내는데 소질이 있는 작가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인 <순열 도시>, <디스트레스>, <디아스포라>에서 그는 육체를 가진 인간을 대체할 인공 생명, 다세계 우주론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을 보여준다. 쉽게 읽히는 책을 선호하는 국내 출판계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된 난해한 그의 다른 소설이 출간되기는 당분간 힘들 것 같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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