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인간광우병 치료하는 `소의 눈망울`
폭력의 인간광우병 치료하는 `소의 눈망울`
  • 북데일리
  • 승인 2005.09.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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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가 영어로 뭐냐? 델몬트. 그럼 선키스트는 영어로 뭐냐???”

요즘 장안에서 잘 나간다는 영화의 명대사란다. 이쯤하면 이 집구석의 ‘영광’은 끝나고 ‘위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조폭영화들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명제를 어김없이 증명하고 있는데, 관객은 그 화려한 말장난 앞에 간혹 이유 없이 무언가 ‘털린’ 기분이 되고 만다.

이처럼 폭력은 ‘논두렁깡패부터 미친 덤불(부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일상의 폭력을 ‘소’(2005. 문학과지성사)의 눈으로 관찰하는 시인 김기택, 그를 만나러 외양간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비에 젖은 구두/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구두 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구두는 벌어진 구두 주걱 자국을 천천히 오므린다/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소가죽 구두’)

출발부터 삐그덕거린다. 비에 젖어 쉬고 싶은 구두를 완력으로 신으니 맘이 편치 않다. 찜찜한 마음을 가다듬고 집을 나와 전철을 탄다.

“전동차 안에서 책을 읽는데/갑자기 글자들이 힘을 잃고 심하게 흔들렸다./....../내 눈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여자!/....../바로 저것이었구나./....../죽음처럼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대대로 이어받는 이 낡고 폭력적인 유산은.” (‘거부할 수 없는 유산’중에서)

아, 폭력 중 가장 `거시기`한 폭력이로구나. 불혹의 꼭지점에 서 있는 시인도 한낱 남정네일 수밖에 없는 이 미혹의 공간을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가.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아무리 더워져도 늘어지는 법 없다./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지고 서늘해진다./....../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소나무’중에서)

간신히 사군자에 의지하여 전철 안에서 발기되었던 마음의 솔잎들을 안으로 갈무리한다. 저 액이 급기야 사리가 되는 것인가.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면서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얼룩’)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자꾸 바짓가랭이에 묻어 쌓는 욕정의 분비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좀 닦아줘야 할 텐데... 저기 이발소가 있다. 들어가 보자.

“이발사는 희고 넓은 천 위에/내 머리를 꽃병처럼 올려놓는다./....../시계만 가고 시간은 멈춘 곳에서/재깍재깍 초침 같은 가위가 귓가에 맑은 소리를 낸다./....../가위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가늘어지더니/창밖에 가득 빗방울이 떨어진다./....../이발사는 어느새 내 머리를 감기고 있다./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만져보니/머리가 더 동글동글하고 파릇파릇하다./비 온 뒤의 풀잎처럼 빳빳하다” (‘머리 깎는 시간’중에서)

머리를 깎으니 정말 수도자가 된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집으로 돌아와 방안에 누우니 그동안 지나쳤던 온갖 소리들이 환하게 들려온다.

“텔레비전을 끄자/풀벌레 소리/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중에서)

귀가 트이니 눈이 보이고, 눈이 보이니 마음이 열리는가. 소가, 소의 눈이 말을 한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어느 시인은 역사 이래 폭력과 광기의 나날이 아닌 때가 없다고 노래했는데, 소의 저 끔벅거리는 눈을 보면 최영의 선생도 “너, 소? 나, 항복!”할 지도 모르겠다.

오늘, 외양간의 황소는 절규한다. “등심 먹고 안심 말고, 인간광우병 대책 마련하라!, 마련하라!! 마련하라!!!” 시인은 소의 순한 눈망울로 우리의 병과 상처를 짚어보고 있다.

(사진 = 출처 http://blog.naver.com/joy5604, 그림 = 정비파 판화작품 `황소의 눈`) [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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