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언어 안에 갇힌 혀끝
잃어버린 언어 안에 갇힌 혀끝
  • 북데일리
  • 승인 2007.07.30 1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데일리]날이 더워 책을 보다가 물을 좀 마실까하고 부엌으로 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밥에 넣을 완두콩을 털어내고 계셨습니다. 깍지 안에 미추룸하게 열 지은 완두콩들의 자태가 하도 고와 어머니께 바투 붙어 앉아 콩을 털어내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한참 나중에서야 물을 먹으러 나갔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모두들,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으실 테지요?

이런 현상을 설단현상(舌端現象)이라고 합니다. 설단현상은 장기기억에 존재하는 특정한 정보에 대해 정확하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일종의 망각 현상으로, 분명히 저장창고 안에는 존재하지만 저장 방법상의 문제나 심리적인 요인 등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 기억 인출에 실패하는 현상이지요.

때로는 귀환을 거부하는 단어들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입 주변을 맴돌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단어들. 혀끝에서 맴돌지만 결코 언어로 내뱉을 수 없는 단어들. 파롤(parole. 개인이 발화하는 언어)은 얼마나 불완전한 도구인가요. 이 역시 설단현상입니다. 단어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사투를 벌이고 있노라면, 그에 따른 고통으로 얼굴은 메두사의 머리를 본 사람처럼 굳어지게 됩니다.

이번 주 소개해드릴 책은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문학과지성사. 2005)입니다. 옮긴이에 의하면, 파스칼 키냐르는 “당신의 책을 꼭 한 권만(한 권이라도) 읽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무슨 책을 권하겠느냐?”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문학과지성사. 2005)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아카데미 콩쿠르 회장은 “키냐르의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사계절. 1992)으로 이미 유명해 국내에도 이미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 <로마의 테라스>(문학과지성사. 2002), <떠도는 그림자들>(문학과 지성사. 2003) 등의 작품이 꽤 번역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추천이 있는 만큼, 키냐르의 작품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소설과 에세이의 혼합입니다. 사실, 그의 저서들은 소설이라 부르기에 조금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 같다가도 읽다보면 수필 같고, 수필이라고 단정하고 읽다보면, 소설적 요소가 보이니 아무래도 전통적인 소설작법과는 거리가 좀 있다고 봐야겠지요.

1부의 ‘아이슬란드의 혹한’은 작가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는 동화를 쓰게 된 배경을 서술하고 있고, 2부는 열여섯에 실어증에 걸렸던 작가의 비밀이 담긴 이야기, 죈느와 콜브륀의 이야기가 바로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3부는 ‘메두사에 관한 소론’으로 작가의 시론과 언어를 찾기 위한 사투가 그대로 드러난 수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 (84p)

그는 이름을 찾았습니다. 그가 힘겹게 뱉어낸 글들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작업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여 어느 부분을 펼쳐놓고 음미한다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다분히 감성적이지만, 이 역시 치밀한 사유를 거쳐 산란된 것이라 어느 부분을 펼쳐 읽어도 새겨 볼 부분이 많습니다. 참, 한 가지 일러드리자면, 이야기의 선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독자보다는 끊임없이 사유하는 독자가 키냐르 읽기에 훨씬 유리하다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단어를 쓰기 위해 그것을 탐색한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얼음 덩어리 앞에서 일시 정지된 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고정된 시선과 경직된 자세로 빠져나가는 단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어 애원하는 자이다. 어느 이름이나 하나같이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이름이 필요할 때, 그것의 작고 까만 육체를 소생시켜야 할 사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소환할 줄 아는 것이 예술이다. (13p)

책은 120p 정도로 얇은 두께이지만 어떤 책보다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읽으시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리라 생각합니다.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는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에 흥미가 있으신 분들께는 이 책이 단숨에 인상 깊게 읽은 책 리스트의 앞쪽을 차지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특히 글쓰기나 언어의 본질에 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계시는 분들께는 키냐르 읽기가 아주 훌륭한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일독을 권합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