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장] 사방은 온통 새까만 먹물이 든 것처럼
[명문장] 사방은 온통 새까만 먹물이 든 것처럼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29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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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 <연인 심청>중에서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사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같은 자리에 놓인 붉은 사과 한 알도 아침과 저녁은 다르다. 빛이 사라진 저녁엔 탐스러운 사과가 아닌 침울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물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건 쉽지 않다. 다음은 <심청전>을 새롭게 조명한 <연인 심청>(다산책방. 2015)의 일부다. 죽음을 앞둔 청이의 감정을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과 함께 묘사한다.

 ‘청이는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해는 타오르면서 일렁거리면서 으깨어지면서 바다 밑으로 침몰되어갔다. 청이는 가슴이 불도장이 찍히는 듯 뜨거워졌다. 살아서 이렇게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리자 바다는 또 다른 표정을 지어냈다. 배가 바다를 가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서 사방은 온통 새까만 먹물이 든 것처럼 변했다. 낮보다 바람이 더 세져서 습한 공기 알갱이들이 청이의 고운 피부에 와 달라붙는 듯했다. 하늘에는 별빛이 하나둘 맻혀 나갔다. 둥그런 달과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저 무수한 별들 가운데 어딘가 자기 별이 분명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자기는 머나먼 별의 사람이고 이제 자기 육신은 죽어 허물어져도 혼은 허공으로 떠올라 그 머나먼 별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126~127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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