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함께 삶의 의미 되새기기
하루키와 함께 삶의 의미 되새기기
  • 북데일리
  • 승인 2007.03.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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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상실의 시대>로 잘 알려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문학사상사. 2000)는 그를 접하게 해 준 첫 책이다. <슬픈 외국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잔잔한 수필 형식으로 풀어나간 1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속에는 일본인 하루키가 느낀 미국속의 일본인, 40대 하루키가 느낀 40대의 인간, 남성 하루키가 느낀 미국의 페미니즘이 있다. 그런 하루키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었다.

- 프린스턴 대학과 U.C.버클리가 상징하는 것

이장은 미국에 머물고 있는 하루키가 본 프린스턴 대학과 U.C.버클리의 차이점을 경험하고 느낀 대로 서술하고 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프린스턴은 좀 품위 있고 체면을 많이 차리는 신사 같은 느낌이다. 입어야 하는 옷이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정장을 입지 않은 교수는 보기 힘들고 학생들의 복장도 비교적 깔끔한 편이라고 한다.

모두가 무언의 약속처럼 그들만의 상식을 세우고 벗어나는 것은 싫어한다. 이런 점은 한국 사회와 많이 닮지 않았나 생각한다. 조금은 경직되어 있고 다수 속에 묻히는 것을 좋아하며 남의 상식 밖에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들. 이런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창조적인 일을 하기에는 좀 힘든감이 있을 것이다.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모두가 YES할 때, 혼자 NO할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U.C.버클리는 젊음과 자유분방함을 한껏 내뿜는 분위기이다. 반바지 차림의 교수도 볼 수 있고 학생들의 복장도 매우 다양하다. 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으로부터 미묘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나의 자유로운 생각이 창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있다.

하루키는 프린스턴과 U.C.버클리라는 미국의 대조적인 두 대학을 보여줌으로써 경직되고 체계적인 사회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두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 미국의 건강한 여성들, 그리고 내 아내

하루키가 미국에서 받는 질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부인은 뭐하세요?” 였단다. 하루키의 부인은 집안일을 거들며 하루키의 원고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하루키의 작업을 보조하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전업 주부인 셈이다.

동양인인 나에게는 전업 주부라는 것이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질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업 주부는 그리 말하기 수월한 직업은 아니었나 보다. 특히 미국 여자들에게 전업 주부는 무능하고 할 일 없이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한심한’ 여자로 생각된다고. 우리 주변에도 ‘페미니즘’을 부르짖으며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 역시 ‘페미니즘’을 옹호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페미니즘이라면 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찾고, 여성을 해방시킨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여성의 진정한 권리와 해방은 여성이 진심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그 일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실현된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자신의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가꾸는데서 행복함을 느끼는 여성에게 전업 주부는 가장 궁극적이고 강력한 페미니즘의 표현이다.

오히려 여성에게 집안일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지 못한 채 또 다른 ‘원더우먼’의 모습을 바라는 것은 이중 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닐까? 사람에 따라서 반론에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생각해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한심하다”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남성이 전업 주부를 한다고 해서 남의 눈에 한심하게 비춰질 일은 아니다. 모든 개인은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그저 자신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 이윽고 슬픈 외국어

이 장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슬픈 외국어>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루키에게 외국어는 왜 슬픈 대상이었을까? 말하는 것이 모국어보다 어려워서? 서툰 외국어 때문에 외국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하루키는 “무슨 운명 때문이지 나에게 있어 우리말처럼 설명의 필요 없이 스스로 명백한 성격의 자명성을 갖지 않는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많은 에피소드들이 우리의 삶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부담 없이 넘기 며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나’의 모습 ‘너’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분주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편안한 친구와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며 가볍게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바쁜 일상에 지쳐서 목적을 잃어버린 채 달리기만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문아름 시민기자 milleddu@ewhain.net]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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