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고래, 오대양을 돌아다니는 화물선처럼
[책속의 명문장] 고래, 오대양을 돌아다니는 화물선처럼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9.25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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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중에서

 [북데일리] 한창훈 작가는 이제 바다의 작가다. 거문도에 거주하며 바다를 품에 안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가 모르는 물고기가 있을까? 바다와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문학동네. 2014)에도 다양한 물고기가 등장한다. 거주형 물고기, 유목형 물고기가 있다니 생경하다. 그러나 더욱 놀라는 건 고래에 대한 부분이다. 위엄한 몸짓만으로도 신령스런 존재로 다가온다.

 ‘멸치에게 수심 수백 미터 아래는 두려운 곳이며 넙치에게는 수면이 낯설다. 그래서 멸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헤엄을 치며 광어는 압력 때문에 납작해진다. 무늬발게에게는 돌멩이 너머가 낯선 세상이며 사람 말을 알아듣는 따개비가 있다 해도 바다의 크기에 대해 설명해주기란 불가능하다.

 벵에돔이나 조피볼락 같은 거주형 물고기는 농경민처럼 영역권을 만들어 저 스스로 거기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회유하는 유목형 물고기, 참돔이나 갈치, 대구 같은 것들도 고작 몇백 킬로미터를 왔다갔다한다. (중략)

 고래는 그 모든 것을 가볍게 무시한다. 허공을 호흡하고 수천 미터 수면 아래에서 침묵하며 꼬리 몇 번 흔드는 것으로 가볍게 적도를 넘어버린다. 고등어가 헤엄칠 때 목표는 조금 뒤에 도착할 곳이다. 먹이가 있을 만한 곳.

 그러나 고래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수천 킬로미터 바깥이다. 동서남북 방위를 깨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자기들끼리 말도 주고받는다. 오대양을 돌아다니는 화물선처럼 완벽한 이동이자 항해. 그래서 고래의 몸은 바닥과 땅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비밀공간 같은 곳이다.’ (234~245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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