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 명문장] 멜론에는 어둠과 햇살이 있다
[책속 명문장] 멜론에는 어둠과 햇살이 있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3.27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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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중에서

[북데일리]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은 쉽다고 여긴다. 그러나 글로 쓰려면 막막하다.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감각적인 글이 있어 소개한다. 존 버거의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2006. 열화당)에 나온 멜론에 대한 글이다. 우리가 아는 멜론이 아닌 존 버거만의 멜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멜론은 자르기도 전에 물기 어린 단내를 풍긴다. 그 안에 담긴 한없이 진한 내음. 하지만 갈증을 해소하려면 어떤 예리한 기운이 필요하다. 차라리 레몬이 낫다.

 작고 녹색을 띨 때라면 멜론이 젊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일은 묘하게도 순식간에 나이를 초월해 버린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머니처럼. 껍질에 난 흠집-흠집이 없는 경우는 없다-은 사마귀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점 같다. 다른 과일의 경우처럼 오래됐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그 멜론이 개성을 지녔으며, 늘 그래왔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이걸 한번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겉모양만 보고는 속을 거의 짐작할 수 없다. 자르는 순간까지 결코 드러나지 않는, 녹색으로 살짝 방향을 튼 그 진한 오렌지색을. 가운데 빈 구멍에 가득한 씨, 옅은 불꽃 같으면서도 촉촉한 색깔의 그 씨앗들이 한데 뭉쳐 매달린 모습 앞에서는 제 아무리 뚜렷한 질서의식도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구석구석 반짝이지 않는 데가 없다.

 멜론의 맛에는 어둠과 햇살이 모두 담겨 있었다. 결코 함께 존재하지 못했을 상반된 것들을 기적처럼 한데 합쳐 놓았다.’ (107,108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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