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눈송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코 똑같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람’들. 우연하게도 그 단 하나의 사람은 또 다른 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표제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남쪽 해안가 마을에서 함께 자란 ‘안나’와 ‘루시아’ 이야기다. 고3 입시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 소녀들. 고모 집에서 지내게 된 루시아와 달리 안나는 비좁고 추운 하숙방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는다. 어른이 되기 전 ‘통과의례’와 같은 힘든 겨울을 보내는 안나의 이야기는 우리를 청소년기로 데려간다.
결혼 후 낯선 신도시에서 살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프랑스어 초급과정>. 남편은 오지 않고 무더위로 잠을 이루기 힘든 여름 밤, 만삭의 몸을 이끌고 혼자 호프집에 간 그녀는 군 입대를 앞두고 흐느껴 우는 젊은이를 보며 생각한다.
“낯선 곳에 가야 한다고 해서 저렇게 흐느껴 우는 건 아직 인생이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야.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어. 그리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꿈만이 가까스로 그 뿌리를 지탱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지.” (P.66)
사업에 실패한 아빠 때문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엄마와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도 아릿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한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그곳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힘들어 한다. 그것은 마지막 작품 <금성녀>에 등장하는 할머니 ‘마리’도 예외가 아니다.
“때로 마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조차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이방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리는 늘 낯선 시간을 원했고 낯선 곳으로 데려다 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정 낯선 곳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마리에게 남은 낯선 곳은 뒷걸음질 쳐서 발에 닿는 어떤 시간의 시원에 있는 것일까.” (P.223~P.224)
소설들을 읽다 보면 지극한 슬픔을 느끼면서도 아름다운 한 시절을 추억하게 된다. 한편, 단편들을 읽어 나갈수록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겹쳐진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두 다르지만 비슷한 인물과 같은 공간 그리고 사건들이 등장한다. 그 생각은 <금성녀>에서 최고조가 된다.
사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각기 다른 문예지에 발표됐다. 작품집에 연작 소설이라는 타이틀은 붙어 있지 않지만, 이런 식의 구조는 우리에게 색다른 재미도 제공한다. 20년 전에 출간된 작가의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 그리고 <타인에게 말걸기>나 <비밀과 거짓말>에 공감했던 독자라면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말한다.
“놀랍다. 지금 은희경이 다다른 이 자리가.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시인의 시에서 탄생해 은희경이 다른 생명을 불어넣어준 저 단 하나의 눈송이를 생각한다. 단 하나의 눈송이. 지상에는 영원히 닿지 못할 운명이었던 눈송이. 눈보라 속 그 눈송이의 자취를 우리는 어둔 눈으로 따라갈 것이다." <정미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