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공포, 문명의 공황, 시인의 통찰
자연의 공포, 문명의 공황, 시인의 통찰
  • 북데일리
  • 승인 2005.09.0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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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이 공황에 빠졌습니다. 바람 `조금` 불었을 뿐인데 `공포의 동심원`은 점점 더 커지는 듯 합니다.

이라크전에서 애써 `충격과 공포`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했던 미국이 되레 공포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댑니다. 서구의 문명이 진작 동양의 `업보`속에 담긴 행간을 심오하게 탐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칭기스칸의 아들 우구데이가 유럽을 정벌했을 때 유럽의 귀족과 기사들은 정체불명의 몽골인에게 엄청난 공포를 느꼈답니다. `통치하지 않는 정벌`의 공포는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유를 모른 채 방안에 갇혀, 군만두만 씹어대던 최민식의 눈동자만큼 퀭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9.11테러와 카트리나의 메시지를 통해 미국은 `중심의 허울`과 `시스템의 허무`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때입니다. 포세이돈의 심술이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뿌린 씨앗이 적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바로 이 지점에서 손택수 시인은 그 씨앗이 지향하는 곳을 그의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 창비)에서 단호하게 짚어줍니다. 먼저 그가 던진 화살을 쫓아가 봅시다.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기세 좋게 뻗어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화살나무` 중에서)

열화우라늄탄을 맞으면 열불이 나겠지만, 시인의 뜬금없는 화살을 맞으니 불쑥 건네준 똥침을 맞은 듯 시원황당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멍해 있을 때 시인은 서해바닷가 쯤에서 자기가 쏜 화살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중에서)

첨단과 속도의 시대에 당나귀 잔등에 올라타기를 좋아하는 이 `오래된 젊은 시인`은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가고 싶은 것인가요. 아니 뒤로 가는 일 자체가 앞으로 가는 일이며, 앞으로 가는 것 자체가 언제나 내 안의 과녁으로 회귀하는 일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자기성찰은 폐가에 두고 온 거울을 통해 절실히 다가옵니다.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집의 거울을 보라/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거울에 화장을 한다/....../폐가는 금이가거나, 깨어진/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중에서)

그 폐가에 겨울이면 호랭이 한 마리가 내려와 깨진 거울을 보면서 사람이 되길 간절히 기원하기도 하나 봅니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고 다른 게로군/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호랑이 발자국`중에서)

용허기도 하지요. 아니면 그분이 오시기라도 한 겁니까.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뻔한 호랭이 이야기를 동공을 크게 뜨고 속삭이는 시인. 들어주는 이 없어도 물새와 호랑이 발자국을 열심히 더듬고 있을 시인의 촉이 다음은 어디로 향할 지 궁금해집니다.

해질녘 오솔길에 당나귀를 탄 사람, 방울소리를 내며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별빛의 발자국 촘촘히 새겨져 있습니다.<[북데일리 김연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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