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나고 구성진 소설 `황진이`
맛깔나고 구성진 소설 `황진이`
  • 북데일리
  • 승인 2007.02.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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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드라마 ‘황진이’가 방영되었을 때, 한 편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래저래 시간이 맞지 않아, 접하지 못했습니다. 황진이의 예인(藝人)으로서의 삶을 주로 다루었다고 하던데, 못 봐서 아쉽습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김탁환의 <나, 황진이>라지요? 저는 이 작품 역시도 아직입니다. 사료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고증하여 쓴 작품이라고 하니, 조만간 아예 주석판으로 그 재미를 느껴볼 작정입니다.

2006 서울 국제 도서전. 북한도서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군침을 흘리다가 급기야 그림엽서세트와 함께 가슴에 품었던 도서가 바로 홍석중의 <황진이>(대훈서적. 2002)였습니다. 500p를 넘는 누렇고 얇은 갱지에 아무래도 시대에 뒤떨어지다보니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삽화의 촌스러움은 눈길을 머물게 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접해보지 못했던 북쪽 작가의 소설을 접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큰 행운으로 여겼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소설 <황진이>가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이 쓴 소설이라는 것이 이제는 꽤 알려져 보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사의 굵직한 선을 따르고 있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할아버지의 작품에 서린 기운을 꼭 빼닮은 듯하여 더욱 호감이 갔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정식 판매대행을 거친 책이 아니라 저작권 소송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읽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황진이>는 북한의 문학작품이면서도 최초로 남한의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어 더욱 화제가 되었던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좀 더 세련되게, 좀 더 보기 쉽게 두 권으로 나누어 편집해 판매하고 있다고 합니다. 1000여 권이 넘는 재고를 전량 수입했다고 하니 저는 기왕이면 북한에서 건너온 책으로 접해보시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전기수’가 되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할 만큼 맛깔나고 구성진 소설이었습니다. ‘전기수’란 장바닥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등에서 사람들을 상대로 소설책을 연재하듯 읽어 주고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몰입한 청자들은 가끔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수호지> 등의 작품을 읽다가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전기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까지 꽤 되었다고 해요. 저는 가끔 전기수가 되는 꿈을 꿉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감나게 읽어주고 싶을 정도의 마력(?)을 발휘하는 소설입니다. 기생 황진이와 노비 놈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전형성을 거부하며, 대단히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인용되는 많은, 적절한 속담, 고유어휘, 사투리, 그리고 미끈하고 탄력있는 구성은 장마 후 불은 강의 물돌이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힘이 느껴지고 새로웠습니다. 게다가 거침없는 성묘사 역시 작품을 찰지게 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이해하는 데 저어되는 부분이 거의 없어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지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이를 영상화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들 역시 제 맘 같았나 봅니다. 어떤 감독이 <황진이>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혜교가 캐스팅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원작자 홍석중과 의견을 같이 해 송혜교도 좋지만, 수애가 주인공이 되었어도 참 좋았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튼 그러더니 드디어, 얼마 전에 겨울 산행 장면을 찍으러 금강산에 갔다더라, 송혜교 연기 인생 최초로 베드신을 찍었다더라하는 기사들을 봤습니다. 영화 <황진이>가 개봉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나 봅니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시설장비를 동원하여 박연폭포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제공하겠다고도 했답니다. 문득 참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전(古典)’은 널리 읽히고, 오래 읽히는 작품을 말합니다.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는 2002년에 씌여졌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과 항구성을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문학사에서 충분히 고전으로 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솜털처럼 가볍거나, 감각에 치중하거나, 일상의 소소함에 그치고 있는 현대의 많은 소설들과 달리 능숙한 손이 빚어낸 것처럼 풍기는 맛이 진하고 그윽하니, 영화도 영화겠지만, 소설로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몇 해 전인가 남한의 작가 황석영과 북한의 작가 홍석중이 만난 자리에서 소설을 공동집필하고 싶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홍석중은 <임꺽정>이 <장길산>으로 이어진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우리 문학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튼튼한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들에 열린 열매들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매고르게 달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눈옷 입은 개울이 속에서부터 녹아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마음은 벌써 기쁘게 봄을 향해 달려갑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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