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섬세한 심리 잘 그려낸 동화
아이들 섬세한 심리 잘 그려낸 동화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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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마냥 자랑스러운 건 아니다. 술만 마시면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아버지, 꾀죄죄한 행색 때문에 친구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아버지는 도리어 원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창작동화집 <금이 간 거울>(창비. 2007)에 실린 단편 ‘삼등짜리 운동회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 경수에게도 아버지는 창피한 존재다.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아버지는 동네와 학교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술에 취하면, “나는 김만득이다. 야! 김경수! 나와 봐라! 어? 김!경!수! 김만득이 왔다!”를 외쳐대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회를 며칠 앞둔 어느 날. 공장 일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경수는 속이 상해 팔딱팔딱 뛰고 징징거리며 울어대다가도 아버지가 대신 오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았다. 사람들이 그와 자신을 알아보는 게 싫을 뿐더러, 행사 중에도 술을 마실까봐 걱정이 돼서다.

하지만, 막상 아무도 오지 않은 운동회는 처량하다. 혹시나 반 친구들이 혼자 온 걸 눈치 챌까봐 내내 조마조마해, 응원도 경기도 즐겁지 않다. 설상가상, 단짝 친구 은경이는 자기만 간식을 잔뜩 먹고, 경수 몫은 챙겨 오지도 않았다. 괘씸하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다.”

경수의 모든 원망은 아버지에게 쏠린다. 도시락이 없어 배가 고픈 것도, 은경이 밥을 얻어먹다가 체한 것도, 배가 아파서 달리기에서 3등을 한 것도 온통 아버지 탓이라고 떠넘긴다.

“다른 아버지들이 텔레비전을 번쩍번쩍 들 때 우리 아버지는 라디오나 하나 간신히 들고, 다른 아버지들이 매일 매일 일할 때 우리 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 일하기 때문에 엄마가 운동회 날도 일해야 하고, 남들이 감기약이나 먹을 때 아버지 혼자 비싼 약 먹어서 내가 닭 다리도 자주 못 먹는 것이다.”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아이. 이제는 달리기에서 일등 한 친구, 줄다리기에 참여한 학부모들, 선생님, 운동회를 만든 사람, 엄마, 엄마 회사 사장까지 전부 밉기만 하다. 상처를 지닌 아이가 공격적이고 삐딱하게 나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뒤틀린 마음을 잡아주는 방법은 예상 외로 간단하다. 조그만 관심과 애정만으로 아이의 불만은 눈 녹듯이 스르르 풀린다.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컴컴해진 골목에서 추위에 떨며 자신을 기다린 아버지를 본 경수.

“내가 부끄러워할까 봐 학교로 오지 못하고 길에서 기다린 거다.”

아버지에게선 여전히 술 냄새가 풍기지만, 어깨가 너무나 작아 보이지만 웬일인지 경수는 그런 아버지가 싫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깨달은 덕분이다.

<금이 간 거울>은 이처럼 아이들의 섬세한 심리를 꼼꼼하게 그려낸 책이다.

집과 학교에서 받은 억압 때문에 도벽이 생긴 아이가 등장하는 표제작 ‘금이 간 거울’과 오빠가 애정을 가지고 기르던 닭을 몰래 잡아먹은 뒤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생 이야기 ‘오빠의 닭’이 흥미롭다.

이 밖에 친구와 다투고 어설프게 화해하는 아이의 심리를 묘사한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 관심을 잃고 흩어져 버린 현대 가족의 모습을 어린이의 시선으로 포착한 ‘기다란 머리카락’ 등 총 5편의 동화가 수록돼있다.

저자는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술래를 기다리는 아이’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인 동화작가 방미진(사진).

그녀는 금이 하나씩 늘어가는 이상한 거울(‘금이 간 거울’)과 치워도 자꾸만 나타나는 기다란 머리카락(‘기다란 머리카락’) 등 독특한 소재를 통해 아이의 내밀하고 불안한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짜릿한 공포와 긴장감을 주는 색다른 이야기가 강점. 여기에 삽화가 정문주의 차갑고 음산한 그림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고아라 기자 rsu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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