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에서 우주인으로 `생각의 전환`
지구인에서 우주인으로 `생각의 전환`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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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한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도 우주는 그 거리만큼 멀게만 느껴진다. 용모단정하고 성실한 아르바이트생 급구라는 말에 선뜻 들어간 가게에서 고사당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대한민국 신체 건강한 남녀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는 한국인 최초의 우주비행사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아니, 꿈이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실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더해지는 것이기에 우주비행사의 꿈은 꾸기조차 벅찬 존재하지 않는 명제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 <우주로부터의 귀환>(청어람미디어. 2002)을 조금 더 일찍 접했다면 우주비행사에 대한 뜬구름 같은 환상이 손에 쥐고 싶은 욕망으로 변했을 것이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 나, 진화의 흐름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류의 우주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은 채 반세기도 되지 않은 근래이다. 물론 우주로의 항해에 인류의 몸을 실은 로켓을 쏘아올린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우주를 향해, 지구 밖을 향해 정신을 쏘아 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 시작을 거슬러갈 수 없는 상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비단 우주로 향한 시선은 아니었다. 새로운 관념의 진화는 어느 시대나 시도되어 왔다. 평면의 지구에서 구의 지구로의 의식의 전환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지금은 상식이라는 단어조차 과분할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그 사실은 당시에는 인지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곧, 그 개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주를 향한 로켓 발사와 같은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책 을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단순히 우주를 경험한 우주비행사의 체험만이 아닌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에까지 그 폭을 넓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찰나의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의 그것은 그 인식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것을 언어화 하거나 문자화하는 등의 구체적인 이미지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때문에 새로운 인식을 위해서는 그 깨달음의 편린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작업과 끊임없는 조각모음이 수반된다.

그렇게 부단한 노력을 거친 그 새로운 인식은 종종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 낸다. 반면 대부분의 경우 순간적인 깨달음은 그것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변질되어 종래에는 그 시작과 동떨어져 표류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류의 진화라는 말에 걸맞은 인식의 대전환은 몇몇 선각자들의 몫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우주를 경험하고 돌아온 우주비행사에게는 이런 새로운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인식이 표면화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것은 NASA(이 책의 인터뷰 대상은 미국인 우주비행사에 국한된다)가 주목한 것은 그들의 사고가 아닌 기술적인 경험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어떠한 곳인가? 그곳에 생명의 흔적은 존재하는가? 우주에서 인간의 신체는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외부적인 관심은 그들의 정신적인 경험과 그에 따른 사고의 전환은 잡아내지 못했다.

또한, 우주를 향한 지구 사람들의 시선은 극히 우주공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호에 대한 시선은 그저 아름다운 사진 한 장의 의미 이상으로 다가오지 못한 것이다. 그와는 달리 우주인이 우주 속에 마주한 강렬한 인식은 경외의 우주 환경보다는 그 속에서 다시 본 지구와 자신과 인류의 진화의 모습이었다. 지구 밖에서만, 전체의 지구를 보는 것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그 무엇이 그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게 된 것이다. 지구 밖에서만 깨달을 수 있었던 그들의 새로운 인식.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그들의 정신적인 체험은 다분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헤아려 볼 수 있다. 이 책의 우주비행사는 앞서도 말했듯 미국인에 한정되어 있다. 미국인에게 종교는 그들이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또는, 신에 대한 인식이 인격신이건 아니건 기독교로 수렴된다. 기독교는 원리주의냐 아니냐에 따라 나뉘고, 주목하는 것과 해석하는 것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결국 그들의 인식은 기독교적인 관념의 틀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우주를 경험한 여러 우주인들은 서로 교파가 다르고 신앙의 깊이도 달랐다. 또, 우주에서 귀환한 후 그들의 행보도 서로 엇갈려 있다. 귀환 후 더욱 신앙심이 단단해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신앙을 버린 사람도 존재한다. 아니, 우주에서의 경험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완전 배제하는 우주비행사도 있다. 우주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들이 종교, 즉 신을 인식하는 길이 서로 어긋났음에도 그들의 경험과 종교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들의 우주에서의 경험은 자신과 지구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고 그 새로운 인식은 결국 자신의 존재, 나아가서 지구의 존재는 우연한 사고의 결과가 아닌 어떠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종교가 그 목적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쓰고 있는 언어(영어)와 같이 기독교 또한 습관처럼 배어있는 문화의 일부분이고 인류와 지구의 의미를 신의 목적으로만 본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종교의 창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틀마저 깨뜨리는 그들의 시도는 종교 속에 있지만 그렇지 않은 변증법적 사고의 진화과정이다.

두 번째로, 이제는 모든 사람이 우주에서의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저 지구는 푸르다. 아름답다. 라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정신적인 충격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태양계에 유일하게 생명이 숨 쉬고 있는 지구. 지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 배경에는 두려울 정도로 적막하고 광활한 우주가 있다. 우주가 가진 무한함의 깊이와 시간의 영속성의 체험을 통해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2차원의 사진으로는 가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던 중세 이전의 사람들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속의 지구의 모습은 광활한 사막에서 모래 한 줌 쥐고 있는 꼴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기 십상인 모래 말이다.

세 번째로,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인식하면서 자신과 인류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다. ‘-이즘’과 ‘종교’로 인한 마찰과 전쟁은 우주적인 시각으로는 지구호라는 한배에 탄 동지간의 반목이라는 것이다. 우주적인 시각. 바로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한 단계 발전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반목과 전쟁의 바탕에는 차별이 있었다. 그 차별은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경멸 혹은 두려움을 가진 인간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해관계에 따른 충돌은 시대에 흐름에 따라 절충되거나 관계가 재정립됨에 따라 해소되지만 차별이라는 저변에 깔린 의식으로 인한 충돌은 현재로서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우주적인 시각. 즉, 지구에 비할 것이 아닌 우주에서의 시선으로 본다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인간에게는 그렇게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많은 공동체이다. 이런 개념은 ‘지구촌’이라는 단어로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지만 그 의미를 얼마나 몸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결국 지구를 떠나 보지 않는 우리에게 우주적인 공동체 의식은 인지는 하고 있지만 체득되지 못한 개념이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상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나 가능하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인류의 인식이 우주 속에서 진화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책의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총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우주비행사들이 지구 밖에서 인식한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존재자체의 인식은 뚜렷한 정답이 없음은 말할 것 없이 그 형상 자체도 불분명해서 인지 자체가 어렵다. 또한 그것은 가보지 않고서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체득할 수 없는 인식의 전환이기에 몇몇 우주비행사가 아닌 대부분의 인류가 우주에 발을 딛지 않고서는 그 전환을 꾀할 수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지구는 평생을 할애해도 다 볼 수 없는 커대한 구임과 동시에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한없이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이야 말로 인식의 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일 것이다. 커다란 지구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곳에 숨어있는 우주에서부터 그 지구를 외로운 행성으로 만드는 무한한 우주에 까지 그 넓은 폭을 아우르는 인류의 인식은 그러한 이중성을 바탕으로 진화해 온 것은 아닐까.

인류가 지구인에서 우주인이 되는 순간을 맞으며 이뤄질 인류의 진화를 우리 세대에서 경험하기를 기원해본다.

[이광준 시민기자 yakwang7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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