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고양이일까` 개운치 않은 동화
`왜 하필 고양이일까` 개운치 않은 동화
  • 북데일리
  • 승인 2006.11.2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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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이 책 <고양이 소녀>(생각과느낌. 2006)는 왠지 낯설지 않았다. `부희령`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 석 자에 습관처럼 저자 소개가 달린 책 표지 날개를 들추었다. `모래 폭풍이 지날 때`, `엄마가 사라졌다`, `새로운 엘리엇` 등을 번역한 사람, 그리고 그 자신이 소설을 낸 사람, 한 때는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 나는 `이 저자가 드디어 오랜 천착 끝에 청소년 소설을 만들어냈구나`라는 부러움과 설레임으로 책을 열었다.

나는 저자와는 달리 고양이를 무척 싫어한다. 그저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징글맞게 싫어한다. 오래전 외할머니로부터 들은 말은 해묵은 어떤 금기의 깃발이 되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꽃혀 있어서 일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들은 해코지를 한다. 고양이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터를 따른다."라는 식의 편견이 담긴 터부의 깃발 말이다. 게다가 이런 나의 고양이에 대한 금기를 더욱 강화해준 것은 Poe의 소설 `검은 고양이`이외에도 여름밤이면 하던 `전설의 고향` 시리즈물이었다.

우리네 전설 속에서, 민담 속에서 고양이의 이미지는 긍정적인 경우는 거의 없을 듯 하다. 어쩌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는 고양이는 사람과 친화될 수 없는 어떤 금기의 원형이 존재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저자가 책 뒷이야기에서 밝힌 바처럼 어쩐 일인지 요즈음의 세대들은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양이들이 갖고 있는 속성이 개인화된 현대 사회의 그것과 상통하기 때문일 듯도 싶다. 적당히 방해받지 않고, 적당한 고립의 공간을 유지해 줄 것, 적당히 머리 쓰고 적당히 몸을 사릴 것, 등등.... 이 역시 부정적 시각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나란 사람이 결코 고양이적인 성향을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좋아할 수 없는 끈적한 성격의 사람이라서 일게다.

책 속의 민영은 고양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책 속의 화자 중 하나인 고양이 `야옹이`는 민영이가 고양이 인간일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도둑고양이들은 사람을 경계하지 사람을 따르지 않는데, 야옹이를 포함한 많은 도둑고양이들이 민영에게서 친근한 냄새를 맡고 민영을 따르게 된다. 심지어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터키쉬 고양이까지도 민영에게서 자기네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고 민영의 곁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

민영이 고양이들에게 고양이 인간이든 아니든 간에, 민영 그 자신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났는데 어머니마저 함께 살 수 없는 외로운 처지이다. 그녀를 거두어 돌보는 것은 김밥을 말아 행상을 하는 외할머니의 몫이다. 예민하지만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민영에게 자신을 따르는 고양이는 현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민영도 선뜻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못한다. 정이 들거나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 마음속의 태생적인 불안심리가 그녀로 하여금 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고양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거리의 고양이를 거두어들이고, 친구들로 부터 고양이를 분양 받아 잠시 돌본 뒤, 고양이들을 위해 더 낫은 환경(그녀는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을 더 낫은 환경이라 믿고 있다) 의 가정으로 매매한다.

책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고, 솔직히 커다란 사건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밍숭밍숭한 소설일 수밖에 없게 된 커다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커다란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비교적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는 민영이 한이란 심약한 소년에게 인터넷을 통해 야옹이를 팔고 난 이후에 벌어진다.

철석같이 민영을 고양이 인간이라 믿고 민영의 사랑을 희구하는 야옹이는 건방진 집고양이 궁금이가 있는 한이네 집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한이가 최선을 다해 야옹이를 돌보려 하지만 허사일 뿐이다. 더구나 야옹이 입장에서 볼 때 한의 누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궁금이는 성가신 존재이고 아무런 생철학이 없는 머리 빈 고양이일 뿐이다. 고양이로서 묘성(고양이의 개성)을 살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야옹이의 허전한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갇혀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민영이가 돈을 주고 고양이를 매매한다는 내용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퍼졌을 때, 민영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는 이는 한이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아무도 민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아예 포기한 민영이지만 한이의 따듯한 배려로 함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 기차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사건은 화해와 이해를 향해 나아간다.

스토리는 전부 소개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니, 그냥 내 감상이나 평으로 `고양이 소녀`를 독후감을 마감할까 한다. 어딘지 탐탁지 않다. 요즈음 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고양이의 이야기가 또 다시 중심 소재로 등장한 점부터 석연찮다. 김진경 씨가 오래 전에 쓴 `고양이 학교`가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마저 이 석연찮음을 배가시켜준다. 여하튼 고양이 소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소통을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야한다는 것일 턴데, 꼭 고양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끌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부희령씨 정도라면 더욱 서사가 분명할 수 있도록 중심 소재를 잡아낼 수 있었을 테고, 보다 선이 굵은 플롯을 통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철학을 설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리의 묘사란 차원에서도 조금은 실망스럽다. 의식의 표면에서 포착된 물에 뜬 기름은 건져진 듯 하나, 무의식과의 의식의 중간층에 속해있는 기름 알갱이들까지는 건져 올리지 못하고 여전히 흐릿한 이야기가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 창작 소설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좋은 문장력을 갖춘 번역가이자 소설가가 성장 소설을 다룬 점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청소년 창작 소설이 이제 유아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희령씨 자신도 자신의 내부 속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에는 아직 힘에 부치는 듯싶다. 하지만 고운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보고 싶다. 이야기로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는 아동문학 작가 지망생인 내게 부희령씨가 이 책을 통해 나름대로 이룬 성과는 여전히 흉내라도 내보고라도 싶은 것이므로, 그녀가 차근히 옮긴 몇 걸음부터 따라가야 할 처지이므로.

[북데일리 김영욱 시민기자]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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