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운 새로운 그릇에 다양함 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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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데일리
  • 승인 2006.08.0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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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상토론]소설 <내 머릿속의 개들> 작가 인터뷰

제11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내 머릿속의 개들>(문학동네. 2006)의 작가 이상운은 1997년 장편소설 <픽션클럽>으로 대신창작기금을 받으며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달마의 앞치마> 장편소설 <탱고> <누가 그녀를 보았는가> <내 마음의 태풍> 이 있다.

북데일리는 외모지상주의를 소재로 한 이번 작품의 시민기자 난상토론회를 열면서 작가 이상운과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기자 원래 <내 머릿속의 개들>은 행갈이가 전혀 없는 소설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형식의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상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적합한 형식을 궁리하다 보니 그게 좋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다소간 ‘광대’ 같은 면모가 있는 혼란스런 사람으로서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정신과 의사에게 때로 희극적으로, 때로 비장하게 토해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무질서해야 하지 않을까요?

행갈이를 하고, 문단을 나누고, 챕터를 나누고 하는 것은 글쓰기에 있어서 기본적인 ‘질서’에 해당하거든요. 바로 그 질서를 무시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과 작품의 형태를 일치시켜 보자고 생각한 것이죠.

기자 정신과 의사에게 들려주는 화자의 ‘말’을 통해 진행되는 방식, 작중에서 ‘개들’ 이 뚱보인 여성을 잡아먹는다든가, 그 잡아먹은 것을 주인공에게 다시 먹여 뚱보가 되게 한다는 상상에서 실험성이 돋보입니다. 어떤 계기로 이런 형식의 소설을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상운 세상과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광대한 우주와 기기묘묘한 진화의 역사 끝에 매달려 있는 인간 종과 온갖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저는 평소의 이런 관점을 소설 창작에도 반영하려고 애씁니다. 단순히 내용상으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말입니다. 작중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시면 되리라 봅니다.

기자 실업, 비만, 외도, 외모지상주의 등의 사회적 문제를 소설의 중심에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상운 저는 소설은 가능한 한 다양한 시선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구조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소설이 이야기를 읽는 단순한 즐거움뿐만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를 키워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작품으로 제가 의도한 것은 우선은 언어적 형식적 실험과, 다음의 두 가지 테마였습니다.

하나는 IMF구제금융 이후 경제적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두면서 온 세상을 구조조정 천국으로 만들어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조롱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모, 돈, 내면 등등이 얽혀 있는 우리시대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에 대해 좀 따져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기자 고달수, 장말희, 마동수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요.

이상운 어떻게 보면 그 세 인물은 각각 희생자적인 면이 있습니다. 저마다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다 보니까 작중 현재와 같은 그런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교활한 ‘구조조정’의 화신 마동수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물론 내가 만들어낸 인물이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요. 장말희는 명백한 희생자인데, 그래서 마지막에 ‘모호하나마’ 자기 의지로 ‘남성’의 세계에 대항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애착이 가는 인물이라면 당연히 주인공인 고달수겠지요.

그는 동물적으로 욕망하고, 인간적으로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도덕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그걸 회피하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초상이죠. 저는 이런 식으로 쉽사리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복합성을 지닌 주인공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기자 소설가 이혜경씨와 나눈 인터뷰에서 전업 작가로 사는 평범한 일상들이 엿보여 흐뭇했습니다. 글쓰기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요.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합니다.

이상운 글쓰기는 정신적인 모험이자 미학적 모험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기도 합니다. 책이 좀 팔려주면 돈벌이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시간 속에 물처럼 흘러가는 인간과 사회를 탐구해서 소설이라는 미적 구조물로 고정시킬 수 있다는 게 매력적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를 지진계에 비유한 바 있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변화와 진동, 때로는 격변과 위험을 앞서 포착하여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에 대해서 말하자면 “방법적 가벼움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결코 무겁지 않은 재미있고 새로운 형식 속에,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라고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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