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사랑을 까발리다
알랭 드 보통, 사랑을 까발리다
  • 북데일리
  • 승인 2005.11.2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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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21세기 최고 연애술사’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 이은 연애소설 <우리는 사랑일까>(은행나무. 2005)가 도착했다.

런던에 사는 광고회사 직원 앨리스와 남자친구 에릭의 연애과정을 탐험한 알랭 드 보통은 영화, 철학, 인문, 예술분야를 넘나들며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발설’ 한다.

앨리스는 남자친구 에릭의 아파트에서 우연히 에릭의 비서가 전화응답기에 남긴 행사만찬에 파트너를 데려와야 한다는 녹음을 듣게 된다.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그가 같이 가자고 청하기를 바랐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람? 내가 그이의 소지품도 아니고, 그날 밤에는 TV에서 (야전병원)을 방송하는 날이니까 괜찮아’,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다구, 따분한 회의장 만찬에는 가고 싶지도 않아’ 라는 생각과, ‘에릭은 동료와 상사 앞에서 내가 자기를 창피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나?’, ‘다른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나?’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충돌해 앨리스를 괴롭혔다.

만찬 날 에릭은 파티장으로 가기 전 엘리스에게 전화해 쾌활한 목소리로 “나비넥타이를 매는데 10분 걸렸다”고 말했다. 어설프게 “잘 다녀와”라고 인사했지만 엘리스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갈 뿐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앨리스의 이와 같은 상태를 “당신은 날 많이 사랑하지 않아 라는 억압된 두려움과 내가 말도 안 되는 걱정으로 당신을 괴롭히면 안 되는데 라는 타고난 심리적 규범이 폭발적으로 뒤섞여 상호작용 하는 것이 애인의 편집증을 낳는다”(본문 중)라고 표현한다.

저녁 9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전화조차 없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자를 네 가지 모습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주류 기독교인 : 그는 전화할 거야, 하지만 한참 걸리겠지.

▲불가지론자 : 내 눈으로 그를 봐야 믿을 수 있어.

▲거듭난 기독교인 : 그는 먼저 연락하려다가 곧장 여기 오기로 했지만 교통체증에 걸린 거야. 문구멍 위에 페인트칠이 흐려진 부분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곧 그가 문으로 들어올 거야. 어쩌면 늦은 걸 사과하려고 꽃을 사러 갔을 지도 몰라.

▲무신론자 : 계속 꿈이나 꾸셔, 아가씨.

사랑의 영속성을 ‘현수교’에 비교한 분석도 주목할 만 하다. 현수교를 지탱하는 ‘다릿기둥’은 ‘사랑의 확인’을 상징하고 ‘냉담한 기간’은 기둥 사이에 몇 미터씩 늘어진 ‘케이블’이라는 것이다. 머리에 하는 키스, 애정 어린 눈길은 다릿기둥에 해당하고 말없는 식사, 응답 없는 전화는 기둥 사이에 늘어져 있는 케이블에 해당한다.

“사람마다 확인이 필요한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애인 관계에 개입된 케이블의 길이도 각각 다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두 사람 다 따뜻하고 마음이 열려있거나 그저 서로가 필요한 경우, 기둥이 촘촘히 박히게 되고, 애정의 신호가 지속되면서 기둥 사이의 케이블이 거의 늘어지지 않는다. 케이블이 얼마나 길게 늘어질 수 있느냐는 애인의 성격과 내 능력에 좌우된다. 자기가 사랑스럽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면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상대의 기둥 없이도 케이블은 수백미터 늘어뜨릴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해’가 부족함을 벌충하므로 ‘당신을 사랑해’란 말이 덜 필요하다. ‘당신이 왜 날 사랑하지 않겠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본 태도다” (본문 중)

수식과 도표, 단계와 상황 별로 표현돼 있는 알랭 드 보통의 ‘사랑방정식’은 볼거리와 읽을거리 그리고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어 ‘말’하지 못했던 모든 남녀들의 ‘비밀의 말’을 풀어내는 알랭 드 보통의 달변은 여전히 메가톤급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북데일리 정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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