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시집을 보며-마지막이라는 슬픔
박경리 시집을 보며-마지막이라는 슬픔
  • [서유경]시민기자
  • 승인 2008.07.11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얼마나 슬픈 힘을 가졌는가. 폐암으로 힘든 투병생활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던 것은 고인의 말대로 희망의 표현이었을까? 고인의 빈소를 지키고 있던 사위 김지하님의 얼굴과 영정사진속 환한 모습의 고인을 번갈아 떠올려본다. 한국문학에 <토지>라는 거대문학을 남기고 이제는  '토지'의 품으로 돌아간 고 박경리님의 마지막 시를 딸 김영주님이 시집으로 엮어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위안이 된다.

"요즘 나는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예순 편 정도를 추려서 시집을 내려고 생각합니다. 생애 마지막 작업이라 생각하고, 가족사 같은, 내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일들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한평생 소설을 써온 내게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입니다. "

생전 마지막 인터뷰의 한 부분 으로 존재를 알렸던 고인. 신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는 그 마음을 담았다.

책에 수록된 39편의 시에서 잔잔한 슬픔과 지나온 삶에 대한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라는 형식을 빌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낯선 타인에게 툭 던지고 싶었던 인생의 아쉬움, 다시 만날 수 없는 당신의 어머님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다 꿰고 있어 미움내지 슬픔의 감정의 잔재는 갖고 있지 않을 것만 같은 고인의 미소 뒤에 숨겨진 슬픔이 전해진다. 얼마나 힘든 삶이었을까.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리라.

시집에는 당신의 내밀한 속내와 인생을 살아오며 터득한 지혜들이 담겨있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나비장 하나로 이어지는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 등 곳곳에 담겨졌던 많은 말들이 시가 되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순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마지막이기에 너무 슬퍼서 읽어내기가 두려웠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갈 것 같은 미련한 우리에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말하는 고인은 진정 삶에 대해 홀가분하기만 하였을까.

 이 얇디 얇은 시집으로 밖에 고인을 만날 수 없다니, 어쩌면 이리도 삶은 허무한 것인가. 고인의 가슴, 깊은 골짜기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리를 어찌 다 헤아리며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만 그 큰 나무의 곁가지를 품을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비밀

사시사철 나는 

할 말을 못하여 몸살이 난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애기는 아니며

다만 절실한 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절실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행복......

애정......

명예......

권력......

재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일까

실상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머릿 속이 사막같이 텅 비어 버린다

사물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기도 하고

시간이

현기증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그게 다

이 세상에 태어난 비밀 때문이 아닐까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