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아]남녀 사이에 필요한 '배려'라는 이름의 연극
[정인아]남녀 사이에 필요한 '배려'라는 이름의 연극
  • 정인아 시민기자
  • 승인 2008.06.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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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남자를 유치하고 단순하며 가련한 존재로 웃음거리 만드는 데에 능한 다나베 세이코의 저서, <아주 사적인 시간(북스토리, 2007)>를 읽었다. 그녀의 또 다른 책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단편집마다 빼곡히 박혀있는 어리석은 남자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며 저마다의 생활을 즐기는 멋진 여자들의 생활을 정말 재미있게 봤고 두고두고 읽고 있기 때문에, 별 고민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주인공 노리코는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아닌 벼락부자의 아들 고의 끈질긴 청혼에도 넘어가지 않다가, 호화로운 맨션이라는 '실질적인' 것에 반해 결혼에 응한 '실속있는' 여자다. 과시적이고 호색한에 자기 위주인 고가 자신에게 홀딱 반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넘치는 돈을 맘껏 소비하며 스스로를 '사치'한다고 생각한다.

옷을 디자인하고 일러스트를 그리는 예술가에 가까운 그녀의 성향은, 물질적으로 과시욕을 뽐내면서 교양과는 담을 쌓는 고를 경멸하지만, 적당히 그의 시중을 받아주는 것으로 그와의 깊은 애정이 없는 결혼생활을 정당화하려 한다. 사실 그런 것을 미안해하지도 않으며, 그저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닌 삐진 그의 마음을 달래줘야 하는 것 자체를 귀찮게 여겨서이다. 심지어 그녀의 프라이버시인 작업장에 고가 열쇠를 훔쳐 들어와 그녀의 일기장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녀는 화를 내다가도 남편이 그 때문에 도리어 화를 내는 것을 풀어줄 것이 번거로워 자신을 억제하기까지 한다.

남편과의 즐거운 대화다운 대화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주인공이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그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질투조차 맹렬하게 하는 까닭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이유로 구타까지 당해 친구조차 마음대로 만나지 못한다. 점차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을 끼워 맞추는 생활에 지친 끝에 나름대로 즐거웠던 3년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정서적인 교감이 없이 물질적인 면의 충족으로만 결혼생활을 유지하기에는 그녀의 사치에 대한 탐욕이 부족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3년간의 결혼생활 유지도 순전히 그녀 혼자만의 노력으로 남자를 어르고 달래며 근근이 이어온 생활이었지만, 더 이상 그녀는 그런 역할을 거부하게 된다. 그녀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듯 그동안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동안 나름대로 그녀를 '봐주던' 남편이 그동안의 그녀의 씀씀이를 조목조목 계산해왔다는 것을 생색내듯 말하고 그녀가 그의 가족에게 보다 충실하길 바란다고 요구함으로써, 그를 화나게 만들기 싫어 이에 응하는 그녀는 점점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원래 사랑했던 혹은 서로에게 상냥했던 남자와 여자 사이에 냉혹한 말이 처음으로 오갔을 때의 심적 충격은, 세상의 그 어떤 큰 사건에도 필적할 만하다. 또 만일 한쪽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한 쪽이 그런 말로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범죄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보통의 범죄와 달리,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은 누구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렵다'.

 연애나 결혼생활이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맞춰주는 게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는 허탈함이 느껴졌다. 결국 인간은 모두가 혼자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연극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활자화된 것을 직접 확인하니 어쩐지 무서운 기분이 들게 한다.

 핑크빛 달달함으로 가득찬 소설도 기분전환으로는 좋겠지만, 이젠 그 기저의 '가식'을 알아버려서 건조하지만 현실적인 소설이 더 끌린다. 신데렐라 드라마를 보며 냉소를 날리는 '언니'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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