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지식] 겉은 종교탄압 속은 정치 싸움 ‘천주교 박해 사건’
[책속의 지식] 겉은 종교탄압 속은 정치 싸움 ‘천주교 박해 사건’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6.02.15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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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 그 가슴에 담긴 말> 장진호 지음 | 글누림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 박해 사건은 크게 세 번 일어났다. 1791년의 신해사옥, 1801년의 신유사옥, 1866년의 병인사옥이다. 겉으로는 종교탄압이지만 알고 보면 정치 싸움이었다.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세상을 달리하자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된다.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세자를 공격하는 벽파(僻派) 세력이다. 그들 대부분은 남인과 노론들이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는 시파를 가까이하고 벽파를 멀리했다. 천주교 신자의 대부분은 시파 즉 남인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조가 죽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됐다. 1801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대비가 섭정을 시작하며 금압령(禁壓令)을 내렸다. 이때 일어난 사건이 신유사옥이다. 박해의 표면적 이유는 종교탄압이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대립과 투쟁이 도사리고 있다.

정순대비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로 원래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시파와 벽파의 대립에서 늘 벽파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세자와 영조를 이간시키고 사도세자를 경운궁에 이거하게 한 김구주도 정순왕후의 아우였다.

정조의 죽음을 계기로 벽파들은 정순대비를 등에 업고 남인세력인 시파를 척결하는데 천주교라는 포장을 덧씌운 것이다. 천주교 박해는 시파와 벽파 간의 정쟁이 빚어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 때 일어난 병인사옥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는 이처럼 단순한 종교 탄압이 아니었다.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권력층의 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리 문화를 다양한 기층으로 해설한 <우리 문화 그 가슴에 담긴 말>(글누림.2015)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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