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
지금! 인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
  • 북데일리
  • 승인 2007.09.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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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2007년 여름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을 개설했다. 이태진 학장의 말에 따르면 신문에 인문학 최고위 과정 모집 광고를 내고도 혹시 미달 사태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정원의 배에 가까운 수가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려면 인문학에 기초한 문화적 역량을 쌓는 것이 필수적이라는데 기업인들도 동의하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여러모로 곱씹을 만 하다.

왜 기업 CEO를 비롯한 지도층 사람들은 실용적으로 보이지 않는 인문학적 기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은 위의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고 있다. 2003년 7월 동경경제대학에서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세 명의 강사가 강연한 것을 기초로 해 쓰인 책이다. 강사는 서경식, 노마 필드, 가토 슈이치 세 사람이다.

서경식은 재일 조선인 2세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책 <나의 서양 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소년의 눈물> 등은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다. 노마 필드는 시카고 대학에서 일본문학과 일본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카토 슈이치는 일본의 문명비평가로 일본에서 유명한 지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이다.

먼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교육, 자신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교육 바로 이것을 인문교양이라고 말한다”고 한 이경식의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빠른 변화 속에서 나 자신조차 잊고 살게 된다. 나는 삶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우리를 다시 주인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인문교양이라고 말하는 것일 테다.

카토는 이렇게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좋을지 방향을 모르면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운전사로 변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여러분 자신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적 교양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인으로 우리 삶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인문적 교양이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교양이란건 전문영역 사이를 움직일 때, 요컨대 경계를 넘나들기(cross over)를 할 때 자유롭고 유연한 정신의 운동을 가능케 해줍니다. 전문화가 발달하면 할수록, 전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움직일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이 대단히 중요해지지요. 그런 능력을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가 교양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과 기술, 교육이 발전하면 할수록 교양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카토는 ‘통섭’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 우리사회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 역시 위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인문교양이란 기본체력이다. 축구선수가 발재간이 좋아야 하고, 또한 수영선수가 물을 부드럽게 타고, 손동작, 발동작, 턴동작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다면 이러한 기술은 모두 무용지물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술은 실용적인 것이다. 하지만 체력이 축구에 실용적이 아닐지라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단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지나치게 실용 적으로 성취 가능한 것들에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 막상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조차도 몰라서 허둥댈 수밖에 없다. 이런 때에 우리의 중심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인문교양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물질문명은 일구었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도 없다. 물질문명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바 크다.

하지만 이는 많은 문제점도 갖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황폐화, 황금만능주의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이 그것이다. 과학 기술의 목적과 가치가 인간의 물질적인 삶에 치중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물질문명이 너무 치중하고 있다. 지나치게 빨리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으며, 우리 주위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의 소중함도 감상할 수 없고, 밤하늘에 있는 별 하나를 쳐다볼 여유조차 없이 살고 있다. 게다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적 교양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 있는 삶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사회건설이 우리의 목표이며,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인문교양 본연의 의미가 될 것이다.

인문학이 죽으면 우리 사회는 목표를 상실할 것이며,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인문학은 우리 삶의 좌표이다. 눈앞의 목표달성과 이익에만 급급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이다. 자기계발도 중요하고 실용적인 것도 좋지만, 인문학적 교양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면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깊은 뜻을 되살려 주는 책이다.

[시민기자 이동환 eehw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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