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에게 독서란 마법의 열쇠
프루스트에게 독서란 마법의 열쇠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6.04 0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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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지 않은 역자 서문

 [북데일리] <독서에 관하여>(은행나무. 2014)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예술론을 드러내는 역자 서문 두 편과 화가들에 대한 에세이 여섯 편을 소개하는 책이다. 우리는 보통 프루스트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소설가로만 기억한다. 그는 소설을 쓰기 이전에 번역가였으며 미술 평론가이기도 했다.

표제작 ‘독서에 관하여’는 존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에 프루스트가 쓴 역자 서문이다. 그의 글이 서정적이기는 하지만 서문치고는 상당히 길다. 더불어 긴 단락과 장문으로 이어지는 글 때문에 단문에 익숙한 사람들은 읽기가 힘들 수 있다. 독서에 대한 아래 내용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독서가 그것 없이는 들어가지 못했을 마법의 열쇠로서 우리 내부에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독서는 우리의 삶에 유익하다. 반대로 독서가 정신의 개인적인 삶에 눈을 뜨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대체하려 할 때 위험해진다. 그럴 때면 진리는 우리 이성의 은밀한 발전과 감성의 노력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한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쉬고 있는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미 준비된 꿀을 음미하는 것과도 같이 서재 선반들에 꽂힌 책들에 손을 뻗어 닿기만 하면 되는 물질적인 것이며, 위험한 존재가 된다.” (p.38)

프루스트가 역자 서문을 쓴 책의 저자 러스킨은 ‘영국의 대문호’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미술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예술작품을 통해 민중에게 교훈을 주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하려 한다.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애독자였지만, 7년에 걸쳐 그의 책 두 권을 번역하는 동안 점점 그에게 반발하게 된다. 러스킨이 도덕으로 예술을 평가하는 것 처럼 예술에 절대적 가치를 갖다 대는 것은 ‘이상적’ 예술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프루스트는 러스킨을 탐독하고 반박하면서 번역자를 뛰어넘어 소설가로 거듭난다. 마침내는 7부작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게 된다.

책에서 프루스트가 몇몇 화가들과 그들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은 앞서 소개한 역자 서문과는 사뭇 다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사르탱이 1728년에 그린 ‘식탁’이라는 그림에 대한 글 중 일부분이다. 독자들이 마치 직접 눈으로 그림을 보는 듯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가을에 수확을 끝낸 과수원처럼 영광스러우면서 헐벗은 커다란 쟁반 위에는 큐피드의 볼과 같이 포동포동하며 분홍색인, 영원한 생명만큼이나 매혹적이고 근접할 수 없는 복숭아들이 한가득이다. 개 한 마리가 닿지 않는 곳에 올려져 있는 복숭아 더미 쪽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는 복숭아들을 소유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들어 그것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한다. 개의 시선은 솜털로 덮여 있는 복숭아 껍질의 부드러움과 그윽한 향기의 감미로움을 음미하고 즐기는 듯하다. 낮과 같이 투명하고 샘물과 같이 매혹적인 술잔들이 보인다. 반 정도 술이 남은 잔들은 어느 정도 해소된 갈증의 상징처럼, 여전히 뜨거운 갈증을 상징하는 듯한 완전히 비어 있는 잔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다. 시들어 처져 있는 꽃부리와 같이 잔 한 개가 쓰러져 있다.” (p.111)

책에는 에세이에 설명된 그림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흑백이어서 그림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책 전반부의 역자 서문에는 각주가 너무 많아 익숙치않은 사람에게는 다소 번거롭게 느껴질 듯싶다. 출판사 측에서는 ‘전공자와 전문 번역자들이 번역에 참여하여 유려한 텍스트는 물론 해설과 도판 등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이 책이 그 의도를 달성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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