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 학문만을 중시하고 국방과 같은 실질적인 정치에는 소홀했던 조선이라는 시대에 태어나, 남한강 마암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장조이. 장조이의 죽음 배후에는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존재한다. 지난 기행에서는 장조이 열녀비가 있는 여주를 찾아가 자결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이번 기행에서는 그녀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친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 ‘전쟁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이름마저 남아있지 않고 쓸쓸하게 공원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장조이의 사인(死因)을 찾아 병자호란 당시를 알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갔다. 장조이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전란 중 수많은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결을 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만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쟁의 끔찍한 참상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산에 둘러싸여 있는 남한산성 행궁은 주말을 맞아 시원한 땀을 흘리며 길을 내려가는 등산객들과, 즐거운 얼굴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행궁을 향해 올라가니 한 나라의 왕이 거처하는 곳이라는 것을 방문객들 앞에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듯, 남한산성 행궁의 2층으로 된 정문인 한남루의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남한산성 행궁 전문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한남루라는 말의 뜻은 '한강 남쪽 제일의 누각'이란 의미이며,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양쪽의 문보다 조금 더 큰 가운데에 굳게 닫혀있는 문은 임금이 행차하실 때만 개방된다고 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궁궐에 있던 세자와 세자빈과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었다. 인조는 강화로 떠난 자신의 신하들이 그곳에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오랑캐에 맞서 용감하게 대항하여 물리쳐 주길 바랬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좇은 외교는 결국 강화에 거주하거나 피난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거나, 치욕을 안기는 상처만 남긴 결과를 낳았다. 남한산성 행궁을 모두 둘러보고 난 후, 이번 여정에서 중요한 장소이며 나약한 조선의 암울한 역사가 담겨있는 강화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을 벗어나 강화도에 접어들자, 4월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아침은 춥다고 느낄 정도로 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먼저 병자호란 전투 중 양국간 격전지였던 강화의 남문, 북문으로 이어지는 강화산성과 고려궁지를 찾아갔다. 강화산성은 1637년 청군에 의해 파괴되고, 고려궁지 또한 전란을 겪어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단체 체험학습을 하러 나오기 좋은 날씨에다가 주말이라 그런지 초등학생들이 견학을 위해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는 소리로 인해 고려궁지가 더욱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쳐보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인 강화유수부동헌은 새로 복원을 하지 않았는지, 다른 복원된 문화재와 달리 차가운 듯 하면서도 바랜 색감이 그곳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듯 친근하게 다가와 보는 사람을 오래 서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 양국간 형제의 관계를 맺자고 한 약속을 어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강화산성과 고려궁지가 차례로 무너지고,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허무하게 함락되자 수많은 여인들이 도망치기 위해 갑곶돈대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결국 막다른 곳에 다다른 여인들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돈대 내부를 공원처럼 조성해놓았는데, 햇빛에 반짝거리는 강과 함께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곳곳의 푸른 소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갑곶돈대 안에 있는 팔각의 2층 정자인 이섭정에 올라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는데, 한강의 길목인 너른 강화해협과 더불어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산의 경치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또한, 갑곶돈대는 지금 남아있는 모형 대포가 아닌 실제 8문의 대포를 설치한 갑곶포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포들은 날아간 포탄 자체가 폭발하지 않아 실상 능력은 거의 없었으며, 조준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무기의 성능이 약했다고 알려진다. 국교로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학문과 이상 추구만을 중요시 여기고 국방이나 외교와 같은 현실적인 안건을 고려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군사를 일으켜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금.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당시 후금과 강화조약을 맺었던 장소는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이라는 정자이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길이 바다로 흐르면서 강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넓고 깊은 물줄기와 산맥이 쉽게 보기 힘든 절경을 이루었다.
연미정 주위를 따라 크고 둔탁해 보이는 돌로 이루어진 성곽이 둥그렇게 둘러져 있었는데, 겉에서 보면 마치 조그마한 원형 경기장 모양으로 독특하게 쌓여 있다. 덩그렇게 놓인 텅 빈 정자 양 옆으로 500년 된 느티나무가 허전함을 채워주듯이 기풍 있게 뻗어 있어,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킨 세월의 멋을 더해주는 듯 하였다.
연미정에 올라 잔잔한 주위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미 국운이 다해 몰락해 가는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만을 고수하여 점점 힘이 커져가는 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하고, 연미정에서 맺은 후금과의 형제조약을 어긴 조선의 사대부들은 왜 척화배금(斥和排金)의 정치를 하였는가. 또한 청나라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사대부들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싸웠을지 하는 등의 의문이 들었다.
소현세자빈을 비롯한 조선의 수많은 여인들이 치욕을 당할 때 강화 수비 총 책임자 김경징은 제 살기에 바빴고, 김상용 등은 뜨거운 불에 몸을 던져 굴욕을 거부했다. 당시 순절한 사람을 찾아 충렬사로 발길을 옮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