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와 니노` 종교 문화 넘는 애틋한 사랑
`알리와 니노` 종교 문화 넘는 애틋한 사랑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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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칸! 산에는 독수리가 있고, 정글에는 호랑이가 있네. 사막에는 무엇이 있나?”

“사자와 전사지.”

[북데일리]2005년 겨울, 소소리바람에 몸을 떨며, 잠시 들렀던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 <알리와 니노>(지식의숲. 2005)를 발견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침 꼭 필요했던 따뜻하지만 무거운 느낌의 질그릇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1937년에 빈에서 출간된 소설이 눈앞에 있다니. 게다가 ‘쿠르반 사이드’라는 필명의 작가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원작자가 누군지 아직도 짐작만 할 뿐인 소설. (<알리와 니노>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잊혀졌다가 30년이 지난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발견되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제라도,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집까지 고이 모셔 왔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수도 바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알리’와 ‘니노’의 이야기는 책을 덮고 나서도, 스러짐 없이 고운 에메랄드 빛깔이 지속되는 소설입니다. 유럽의 푸른 반짝임과 광활한 사막의 모래바람이 섞여 묘하게도 에메랄드 빛깔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무슬렘 아제르바이잔인인 스무 살 청년 ‘알리’와 그리스 정교 그루지야인인 열여덟 살 ‘니노’의 사랑은 풋풋하고 순수하여 보고 있자면 웃음이 지어집니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을 하지만, 서로 다른 문화로 인해 충돌하고, 마찰을 빚지만, 둘은 결국 사랑 아래 전혀 다른 동서양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고 양보하려고 노력합니다. 쓰고 보니 뭐, 그렇고 그런 소설 아냐, 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 같네요. 진부하다기보다는 따뜻하고 애틋한 느낌입니다.

예전에 미국에 잠시 있었을 때, 일찍 결혼을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부하러 온 친구가 조촐한 모임에서 물었습니다. “대체 한국 사람들은 인사한 후, 왜 모두 나에게 부인이 몇 명이냐고 묻는 거야?”라고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은, 저도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지요.) 실제로 일부다처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높은 신분과 상당한 재력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일이며, 다처를 공평하게 대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그 친구의 울분 섞인 토로를 듣고, 그 친구가 난감했을 심정적 고통을 헤아리며, 괜스레 미안해졌었습니다.

소설에는 흥미로운 볼거리들이 가득합니다. 히잡(몸을 덮는 옷)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 손으로 식사를 하는 동작의 우아함에 대한 예찬, 하렘(이슬람 국가에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의 구조와 모습,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전설, 이슬람 일상에서의 예절과 격식, 혼인의식, 이슬람의 두 개의 날개라고 할 수 있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관계 등을 잘 보여줍니다. 생소했던 무슬렘의 삶의 모습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소설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다니며 오른쪽 세 손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 아제르바이잔. 비록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무슬렘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자신을 채찍질한다거나, 피의 복수가 국가 질서와 개인의 행동 규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 여기는 무슬렘의 행동이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 역시 서구 시각을 담은 뉴스에 철저하게 길들여져서겠지요.) 책을 읽으며 무슬렘의 모습이 비슷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뮌헨>에 잠시 나왔던 용감한 팔레스타인인 알리를 잠시 떠올리게도 했고, <시리아나>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벌이는 파키스탄 청년 와심과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서술자를 무슬렘인 ‘알리’로 설정하고 이끌어나감으로서, 독자들 역시 자연히 ‘알리’와 같이 행동하게 합니다. ‘알리’는 정통 시아파 교도로 서구 문명의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이슬람에 속해 있다는 것,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 가문으로서의 긍지, 자부심, 그리고 명예를 잃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저도 자신에게 철저한 무슬렘이 되고 코란의 율법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무슬렘의 여자들에 대한 시각만큼은 동조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전, 심판의 날 시계가 더 앞당겨졌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핵전쟁 위협 증가로 인해 11시 51분에서 11시 53분으로 2분 더 앞당겨졌다고 하더군요.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 이것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신의 입장이 아니면 철저하게 배척하는 이기적인 심사와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공존하는 일은, 더 이상 기쁜 일이 아니라 위태로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란 참 뻑뻑한 일입니다. 그것이 내 삶과의 관련성을 떠나, 먼 나라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래서 여러분께 소개하겠다 마음을 먹고, 다시 읽고 나서도, 붓방아만 돌렸을 뿐 한참을 멍해있었던 소설입니다. 직접 읽어보시고 따뜻한 모래바람이 피를 덥히는 느낌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소설의 작법을 따르고 있지만, 1930년대에 지어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이 고루하거나 뒤떨어지지 않으며, 사실적인 서사의 맛 역시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라 여러분 앞에 올려놓습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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