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곡한 모양새 갖춘 얼굴` 같은 소설
`결곡한 모양새 갖춘 얼굴` 같은 소설
  • 북데일리
  • 승인 2007.01.0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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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몇 개월 전 술자리에서 어떤 선배가 저에게 시를 써보라고 제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배는 시인으로, 시를 쓰기로 하면, 당신이 가장 손에 꼽는 시집 열권을 선물해주겠노라 얘기했습니다. 저는 고맙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일일 거 같아 열적게 웃으며, 상황을 얼버무리며 타넘기에 바빴습니다. 이 질문은 재삼 받는 다해도 대답하기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사에의 욕심을 차치한다 하더라도, 시쓰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 여겨 더욱 곤란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내가 시어들을 한껏 다듬어낼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얼마간의 시간을 보들레르와 함께해서 그런지 몰라도, 찰나의 순간의 포획물이 ‘시(詩)’라고 의심 없이 생각해왔던 터라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이 사회에서 인문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위기를 맞고 있었고, 순수문학은 자기계발서나 수험서에 밀려 쪽방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소설가의 연봉은(월급이 아니라) 고작 300만원을 조금 웃돌 뿐이고, 이쪽을 전공한 사람들도 생활고에 시달려 돈이 되는 일들을 찾기에 바쁩니다. 가끔 그럴 때 돈이 되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바보취급을 받기도 하지요. 한 내로라하는 시인은 한 해 동안 잡지 등에 기고해 받은 고료를 모두 합해보니 백이십 만원이더라 하면서 술잔을 부딪치던 멋쩍은 눈빛이 한동안 마음에 불편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터덜거리며 새벽에 집에 들어와 바로 집어 들었던 소설이 마루야마 겐지의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책세상, 2000)였습니다. 무심코 집었지만, 분명 이유는 있었겠죠.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보자니, 하나는 마루야마 겐지가 철저히 문단과 속세를 떠나 오롯이 글쓰기에만 매진하는 징글징글하리만큼 철저한 인물이었기 때문인 거 같았습니다. 그는 스물두 살에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후, 홀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는 정말 ‘소설가’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시소설’이라 칭할 정도로 ‘소설’ 안에 ‘시’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는 ‘시어’이며, 문장 하나하나는 매끄러움을 넘어서 고통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결곡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의 가족>이나, 최근에는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도 마니아들 사이에 큰 호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외 첫 소설인 <여름의 흐름>을 비롯해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들도 물론 좋긴 하지만, 저는 마루야마 겐지를 접해보지 않은 독자들이 이 책으로 마루야마 겐지를 시작하게 되면 더 좋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올려놓습니다. 변방에서 중심을 울릴 수 있는 내공을 지닌 작가는 그리 흔치 않거든요.

<언젠가 바다깊은 곳으로>는 1,2 두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내적 고백이 배어 있는 성장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세이지의 아픔이 넘실대는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작품에는 세이지 외에도 기요시, 야에코, 쓰루 등 기존의 ‘가족’이라는 제도에서 소외당한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제대로 된 어부’가 되어 바다 밑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던져지는 삶의 문제나 세계관은 녹록하지 않지만 굳이 제시해 주려들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임에 있어서 독자의 몫이 큰 소설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마루야마 겐지는 현재형 종결어미와 단문을 사용하여 작품에 현장감과 속도감을 부여합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 읽다보면 분홍색 토끼소년 기요시에게는 시큰한 애정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마루야마 겐지는 이제 국내에도 마니아층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접할 수 있는 책들도 제법 되는 거 같습니다. 질리는 유미주의가 취향 중 하나인 터라, <금각사>를 종잇장 몇 장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끼고 살던 저에게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이 ‘미학을 위한 미학으로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 가벼운 문학’이라고 간단히 폄하하며 충격을 안겨 주었던 작가입니다. 다소 오만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 대부분을 읽고 나서는,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마루야마 겐지를 김훈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일본에 마루야마 겐지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훈이 있다는 게지요. 잘 짜여진 문체의 강건함이 서로 닮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둘 다 고집이 세고, 아날로그적 방식을 지향해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씁니다. 김훈은 한 세설에서, “몸이 언어를 통해 이미지에 가 닿을 때 그의 글은 가장 빛나는 문장을 이룬다. 문체는 몸의 일이다.” 저 또한 그랬지만, 요새도 김훈의 칼로 벼린 듯한 그 문체가 부러워 서슴대지 않고 필사하는 사람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사정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쓰는 소설은 어떠한가. ‘사소설’이라니. 마누라가 어쨌다는 둥, 아버지가 어떻다는 둥 하다가 나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다는 넋두리. 아아, 인생이란 이다지도 고달픈 것인가, 급기야 태어나서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그런 소설은 세상에 발표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벽장 속에나 넣어두고 저 혼자 읽어야 할 글이다. 원고료와 인세로 밥을 먹는 주제에, 돈과는 무연하다는 표정으로 세상의 불행을 온통 저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 한 포즈를 취하고...... 참으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작자들도 없을 것이다.:”

많은 일본작가에게 하는 쓴 소리이겠지만, 읽는 순간 몇몇 소설가가 퍼뜩 떠올라, 적어보았습니다.(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 중 일부분입니다. 독설가에 마초적인 면, 그리고 스피드광까지. 개인적으로는 과한 면이 많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의 글 쓰는 자세와 굽힐 줄 모르는 소신, 그리고 항상성을 높이 삽니다.(김훈은 한 세설집에서 마루야마 겐지가 스스로 이 산문집을 낸 사실 자체가 남세스러운 일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시고, 글쓰기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분들, 혹은, 소설가로서의 꿈을 다지고 있는 분들, 그의 산문집도 한 번쯤은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합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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