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 `메이드물`에 반기를 든 작품
일본만화 `메이드물`에 반기를 든 작품
  • 북데일리
  • 승인 2007.01.0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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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일본 만화에는 메이드물이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메이드(maid)라는 단어 뜻 그대로 하녀가 등장하는 장르를 지칭합니다. 하녀란 단순히 집안일을 도와주는 고용인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메이드물의 하녀는 그런 일반적인 관계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일본 메이드물의 대부분은 성인물입니다. 하녀는 주인에게 있어 성적 노리개이거나 아니면 주인공은 하녀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에게 둘러쌓여서 지냅니다. 메이드물은 남자 하나에 여러 여성이 결합되는 할렘물과도 밀접하게 관계되죠. 할렘물에도 주인공을 둘러싼 여자 가운데 하녀가 끼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메이드에 대한 이런 성적 상상은 비단 만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같은 영화를 보면 집주인이 어린 가정부를 건드려서 임신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 성인동영상에서도 메이드물은 굉장히 인기를 끄는 장르 중에 하나입니다. 변태적인 성적관계에서 제복이나 유니폼이 남자를 더욱 흥분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메이드라는 존재는 일종의 유니폼을 입으면서도 주인이 시키는 것을 모두 하는 복종적 관계라는 것이 이런 성적 상상의 대상이 되는 이유일겁니다.

하지만 이런 메이드물의 흐름에 반기를 든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리 카오루의 <엠마>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초의 영국 런던. 부잣집 도련님인 윌리엄과 메이드인 엠마의 사랑을 다룬 작품입니다. <엠마>에는 여타 메이드물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눈요기 장면(노출 장면)도 없고, 메이드를 성적 도구로 생각하는 경박한 남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윌리엄과 엠마의 관계도 메이드물의 컨벤션처럼 자리잡은 노출 없이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이끌어갑니다. 특히 달빛아래 유리궁전에서 두 사람이 첫 키스를 하게 되는 장면의 섬세한 장면처리처럼, 인물의 심리를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해내는 데 집중합니다.

<엠마>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신파` 입니다. 신분 차이로 인해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정말 질리도록 보아왔습니다. <엠마>의 내용은 그래서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작품을 다 읽지 않고도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윌리엄과 엠마는 서로 사랑할거야` 라는 것을 당연한 듯이 압니다. 그러나 결말을 알면서도 이 작품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주인공인 엠마가 지닌 묘한 매력 때문입니다.

안경을 쓴 사람이 드물던 시절에, 안경을 쓴 메이드라니. 여기에 미모에 단아한 매력, 고운 성격까지 갖추었으니 그녀를 보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깁니다. 작가가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을 엠마라는 캐릭터를 통해 털어놓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엠마는 매력적입니다. 치마가 펄럭이면서 속옷이 드러나거나, 말괄량이처럼 뛰어다니지도 않고, 차분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차분하던 엠마가 신분의 벽 앞에 힘들어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독자는 엠마라는 캐릭터의 감성에 한없이 침전해 들어갑니다.

몇 년 전 부천 국제 영화제에서 <데브다스>라는 인도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무려 3시간에 달하는 긴 영화로 신분이 달라서 사랑을 할 수 없는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인도식 뮤지컬 영화입니다. 그러나 1시간 30분이 지나고 10분간 휴식시간이 주어졌을 때, 극장 복도는 후반부가 어떻게 진행될 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로 웅성거렸습니다. 지극히 뻔 한 내용이지만 섬세한 이야기와 캐릭터로 관객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엠마>는 <데브다스>를 처음 보던 그 때의 경험을 되새기게 합니다. 엠마라는 캐릭터에 취해 허우적거리다 어느덧 책의 마지막장을 펴드는 순간 한없이 조여왔던 가슴이 비로소 진정됩니다.

작가인 모리 카오루는 <셜리>라는 단편집을 통해 메이드에 대한 애정을 한없이 과시합니다. 아직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은 단편집 <셜리>는 13살의 어린 메이드 셜리와 28세의 젊은 여주인 베넷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이 중심이야기고, 그 외에 메이드를 다룬 1회분의 단편 두 개가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엠마>의 연재를 마친 모리 카오루는 후속작으로 <셜리>를 정식으로 연재할 것이라고 하네요. 13살짜리 메이드의 이야기를 모리 카오루가 어떻게 풀어낼지도 사뭇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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