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사진책
`네 삶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사진책
  • 북데일리
  • 승인 2006.12.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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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역전 풍경(서울역 부근 1968~1983)

- 사진 찍은 이 : 김기찬

- 펴낸 곳 : 눈빛(2002.10.1.)

- 책값 : 2만 원

《역전 풍경》이라는 사진책을 처음 본 때는 2002년. 네 해가 지난 지금, 이 사진책을 다시 펼쳐 봅니다. 성냥팔이 아줌마, 빗장수 할아버지, 호떡장수 아저씨, 생선장수 할머니가 보입니다. 예전에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한 질감이 새삼 느껴집니다. 군데군데 좀 떡이 되거나 허옇게 날아간 곳이 보이네요. 밝고 어두운 곳이 아주 잘 맞은 사진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습니다. 사진재주에서는 어느만큼 모자랄 수 있지만, 사진에 담는 마음과 손길이 살갑거든요. 사진기로 들여다보는 세상과 사람들과 서울역 둘레 삶터가 애틋하거든요. 멀거니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좋군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이 ‘좋은 사진’만 몰래몰래 찍으려는 손놀림이 보이지 않아 반갑네요. 네 해 앞서 이 사진책을 사 두기 참 잘했습니다. 그때, 이 사진책을 죽 둘러보고 짤막하게 쓴 글이 있는데, 살을 붙이고 다듬어서 새로 이 사진책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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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님 사진책 《역전 풍경》을 보았습니다. 책값 이만 원이면 만만치 않은 돈이었지만(2002년에는) 책방에서 《역전 풍경》이라는 사진책을 구경하는 동안, 이만 원이 아닌 삼만 원이었어도 사서 볼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산 뒤 혼자서 집에만 놓고 보지 않고, 틈틈이 갖고 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나는 동무나,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사장님에게도 보여드리며 좋은 느낌을 나누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좋은 사진을 두루 구경시키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보람이 훨씬 큽니다.

.. 처음 사진에 입문할 즈음에 나의 사진 주제는 행상이었다. 처음부터 행상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출퇴근길에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관심이 갔다.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풋과일이 잔뜩 담겨진 함지박을 인 아낙네와 어떤 노인은 어깨에 싸리비를 메고 또 어떤 이는 열쇠꾸러미를 가슴에 앞치마 두르듯 두르고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잘 기록해 두었다가 훗날 한 권 책으로 남기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주말이면 뛰쳐나갔던 곳이 바로 서울역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역전엔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은 것은 변함없지만 한두 시간 가만히 서서 들여다보면 30여 년 전 내가 사진기를 메고 처음 드나들던 역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 〈책끝에 붙인 말〉

교보문고는 웬만하면 안 갑니다만, 이곳에 갈 일이 있으면 언제나 들여다보는 곳은 한두 군데 있고, 이 가운데 한 곳이 ‘사진’ 칸입니다. 일 때문에 어린이책 칸도 꼼꼼히 살펴보지만, 책값이 비싸서 좀처럼 사보기 어려운 사진책 칸은 부지런히 둘러봅니다. 짧은 동안에 더 많은 사진책을 구경하려고 애씁니다. 삼만 원짜리 사진책을 그날 하루에 열권을 본다면 삼십만 원이 굳은 셈이고 스무 권을 보면 육십만 원이 굳은 셈이거든요.

사진책은 한 번만 보고 그치는 일이 없습니다. 으레 백 번 이백 번쯤은 다시 보고 또 봐요. 그렇게 보며 이 사진이 어떻게 나왔고, 사진에 나오는 모습은 무얼 담았는지, 또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무얼 생각했는가를 가만가만 짚습니다.

사진 한 장이 대단해서 그렇게 살피지는 않습니다. 글 한 줄이 대단하지 않듯 사진 한 장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게 있다면 바로 우리들 삶이에요. 그러니까, ‘대단한 우리들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우리들 삶이 지닌 궂거나 좋은 모습을 가리거나 속이거나 감추거나 비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이면서, 우리한테 새로운 기운과 힘을 준다면, 참으로 훌륭한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진책을 찾아봅니다. 아무것 아니고 그냥 한 번 쓱 보고 말면 되는 사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사진 한 장을 몇 분쯤 그대로 들여다보셔요.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 그리고 온갖 푸나무와 짐승과 자연과 하늘과 땅이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듭니다. 웃는 사람, 우는 사람, 낯빛이 없는 사람, 찌푸린 사람, …… 온갖 모습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지금은 어떠하며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지고 바뀌는가도 찬찬히 짚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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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교보문고를 찾아갔을 때, 새로 막 나와서 책꽂이 한쪽에 곱게 자리하고 있는 《역전 풍경》(눈빛,2002)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옆에 있는 보기책(견본)을 펼칩니다. 한 장 한 장 차근차근 넘깁니다.

1969년부터 1983년까지 서울역을 중심으로 사진쟁이 한 사람이 바라보고 느끼고 부대끼며 담아낸 모습이 펼쳐집니다. 서울역으로 와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 어딘가에서 와서 서울역에서 내려 제 갈 길을 가는 사람, 서울역 둘레에서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을 붙들고 장사를 하는 사람, 1980년대까지 있던 ‘냉차’를 파는 아지매와 그 아지매를 따라 장사 나와서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가는 계집애와 사내애. 비 오는 날 비닐우산을 팔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이 없어 서울역 앞에 멀거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주머니 치마 속으로 들어가 비를 긋는 꼬마. 치마저고리를 벗어서 우산처럼 걸친 할머니, 바지저고리가 젖을까 봐 위로 잔뜩 치켜 올리고 걷는 할아버지, 학교가방을 머리 위에 이고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꾹 찔러놓고 성큼성큼 걷는 학생, 새벽같이 일어나 하얀 김을 내뿜으며 손수레를 밀며 장사 나오는 아줌마, 추운 겨울 몸을 잔뜩 웅크리고 지나가는 길손이 껌 한 통 사 주길 기다리는 할머니, 짐자전거에 두 길이 넘는 많은 짐을 묶느라 애쓰는 일꾼들, …….

내 모습이고 네 모습이라는 생각이, 우리 모두가 간직했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흔한 모습이고 흔했던 모습입니다. 이 사진에 담긴 모습은 1960?1980년대 모습이지만, 지금은 또 지금대로 2000년대 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잖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모습을 그냥 흘려 넘길 뿐, 지나쳐갈 뿐, 붙잡거나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우리들이라서, 지금 우리 모습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우리들이라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마음을 쓰지 않고, 우리 정치나 문화나 경제가 어떻게 뒤집어져도 ‘나 몰라라’ 하지 않겠느냐 싶기도 합니다. 정작 소중한 삶은, 참으로 애틋하고 눈물겹기도 한 삶은 우리 곁에 있는데, 아니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말로 애틋하고 눈물겹기도 한 모습이며, 이런 우리 삶이 차곡차곡 사진에 담겨서 좋은 이야기를 건네거나 나누기 마련인데.

사진책 《역전 풍경》에 나오는 모습은 아스라한 옛일일까요. 앞으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모습일까요. 또, 이런 모습이 옛날 모습이면 어떻고, 앞으로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면 어떨까요.

하루하루 달라지는 우리 삶이요,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 삶터며, 언제나 숨 가쁘게 돌아가고 바삐 움직이는 우리 세상이잖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해묵은 모습이라 할 서울역 둘레 모습, 서울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책 하나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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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KTX)를 놓는다며 서울역 너른터를 없앴습니다. 용산역 너른터도 없앴습니다. 너른터가 사라진 자리에는 삐쩍 마른 나무를 돈 주고 사다 심었습니다. 해마다 봄가을이면 용산역 너른터에서는 풍물마당이 펼쳐지며 사람들이 북적이며 막걸리잔을 부딪히기도 했는데, 이런 놀이판마저 사라졌습니다. 틈틈이 노동자 집회가 있던 역 앞인데, 수천수만에 이르는 노동자 물결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높다랗고 커다란 전자상가 새 건물이 들어섰고, 불빛 번득이는 성탄절 장식이 가득합니다.

서울역과 용산역 너른터를 없앤 까닭은, 집회를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꿍꿍이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서울역이고 용산역이고 청량리역이고 하루하루 너른터가 줄거나 사라지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안 둡니다. 서울역이 서울역다웠을 때를 잊어버리고, 우리가 우리다웠을 때를 잊어버립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잊습니다. 그저 코앞에 보이는 얕은 이익에만, 눈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돈-이름-힘에만 매달립니다.

너른터가 사라진 서울역에서, 손바닥만큼 줄어든 좁은터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과 어딘가를 오가는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이제 서울역 앞 너른터는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쉴 수도, 모일 수도, 무엇을 즐길 수도 없이 되었습니다. 쉬고 싶으면 ‘돈 내고 어느 가게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돈 내고 들어가는 가게에도 ‘돈을 펑펑 쓰지’ 않으면 눈치를 주기에 서둘러 일어나야 합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시간을 보내기 힘들어지는 서울역 앞입니다. 서울역 앞에 있던 수많은 헌책방은 자취를 감추어 딱 한 곳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로이 북적이던 1960?1980년대 서울역은 책도 자유로이 오가며(하지만 못 읽게 하는 책도 많았습니다) 헌책방도 넉넉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기차를 기다리며 헌책방에서 책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헌책방에서 책 하나 살필 틈조차 내다 버린 지 오래입니다. 서울역 앞은 소주 몇 병을 안주 없이 들이키고, 길바닥이고 걸상이고 아무 데나 드러누워 자는 한뎃잠이 차지가 되었습니다. 용산역 앞은 이마트 주차장이 떡하니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돈-이름-힘에 푹 빠지면서 세상 밖으로, 사회 밖으로 내몬 사람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돈으로 돈 먹는 재벌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임자가 되어 서로 복닥이기도 하고 부대끼기도 하던 서울역이, 어느새 사람 발길 뚝 끊기고 사람냄새 사라지며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뒷골목처럼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는 서울역 사람냄새입니다.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서울역 사람들 웃음입니다. 앞으로도 이처럼 사진으로만 서울역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을까요? 사진이 아닌 삶으로, 사진에 담긴 얼굴이 아니라 맨눈으로 바라보고 함께할 얼굴은 이제는 끝일는지요.

지난날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고 할 수 없고, 지금은 안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앞으로는 아름다움이 어찌 달라질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독재자 세상은 사라졌지만, 먹고살기 팍팍함은 많이 줄었다지만,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우는 세상 또한 어디론가 사라졌고, 먹고살기 수월해진 사람이 늘어났어도 넉넉해진 마음과 살림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즐거운가요? 살 만합니까?

서울역은 개발독재가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구실로 나다움과 사람다움을 기꺼이 내팽개친 우리들이 무너뜨렸습니다. 사진책 《역전 풍경》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를 넌지시 이야기한다고 느낍니다. 아니, 말을 걸고 있습니다. 김기찬 님은 우리한테 《골목안 풍경》과 《잃어버린 풍경》을 남겼고, 여기에 《역전 풍경》까지 하나 더 남겼습니다. 김기찬 님이 계실 하늘나라는 사람냄새 가득한 아름다운 곳일는지요?

[칼럼니스트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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