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고통 없는 곳에서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다던 아이... 어느 날 나뭇잎의 흔들림 속에서 딸아이의 환한 미소를 보았습니다."
오승아 작가는 주위의 모든 자그마한 생명들이 딸아이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비가 날라와도 딸아이의 환생 같았고 나뭇잎의 새싹도 예사롭지 않았다.
예술가에게 고통은 때로 창작의 가장 깊은 뿌리가 된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상실감을 감히 ‘예술적 모티브’라 부를 수 있을까. 여기, 차마 뱉지 못한 슬픔을 삼원색의 찬란한 생명력으로 치환해 나가는 한 작가 오승아가 있다. 그의 화폭은 이제 상실의 기록을 넘어, 미처 피어나지 못한 딸아이의 꿈을 실어 나르는 ‘꿈의 지도’로 거듭나고 있다.
작가의 딸은 병마와 싸우던 힘겨운 시간 속에서도 늘 자유를 갈망했다. "엄마, 나는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어." 아이가 남긴 가녀린 유언은 오랫동안 작가의 가슴에 박힌 채 붓을 멈추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군무 속에서 작가는 기적처럼 딸아이의 숨결을 마주했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것은 마치 아이가 건네는 다정한 안부처럼 느껴졌다. 작은 나무가 대지를 딛고 싱싱하게 가지를 뻗어 올리는 모습에서 작가는 멈춰버린 줄 알았던 딸아이의 성장을 보았다. 아이는 떠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 속에서 더 푸르게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캔버스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빛깔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빛의 근원이자 생명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노랑, 빨강, 파랑의 삼원색이다.
화폭 위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은 작가의 붓끝을 타고 달려와, 그 원색의 생동감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세밀한 무늬로 피워낸다. 노랑은 아이가 마주하고 싶었던 눈부신 햇살의 미소로, 빨강은 멈추지 않고 박동하는 뜨거운 생명의 의지로, 파랑은 아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끝없는 자유의 하늘로 화(化)하여 잎사귀마다 선명하게 새겨진다.
작가는 작은 나무 잎새가 푸른끼를 더할때마다 딸 아이와 친구처럼 함께 걷고 싶었던 계절의 빛깔을 겹쳐 놓는다. 그렇게 완성된 ‘꿈의 지도’는 더 이상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가 바람이 되어 여행했을 무한한 유토피아에 대한 기록이자, 상처를 거름 삼아 피워낸 숭고한 치유의 정원이다.
작가의 작업은 부재(不在)하는 존재를 화폭으로 불러내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의식과도 같다.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 아이의 꿈이 나뭇잎의 싱그러운 무늬와 만날 때, 관람객들은 그 안에서 각자가 품은 상실의 아픔을 위로받는다.
작가가 그려낸 이 눈부신 성장의 지도는 우리에게 나직이 속삭인다.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생명은 바람의 이름으로 흐르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시 피어난다는 것을.
작가의 화폭 끝에서 오늘도 바람이 분다. 아이의 꿈을 닮은 노랑과 빨강, 파랑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며 우리를 그 찬란한 성장의 숲으로 초대하고 있다.
상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의 시작이다. 딸은 꿈을 펼치지 못했지만 화폭에 담아내는 작가의 붓질은, 미처 피어나지 못한 아이의 시간을 세상과 다시 연결하는 애틋한 의식(儀式)과도 같다. 캔버스 위에 켜켜이 쌓인 색채들은 상처를 덮는 따뜻한 거름이 되고, 멈춰버린 딸의 꿈은 마침내 작가의 손끝에서 눈부신 풍경으로 귀환한다.
부재(不在)하는 존재의 꿈은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가. 딸을 가슴에 묻은 작가는 멈춰진 그 꿈들을 자신의 화폭 위로 건져 올리며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치유의 미학을 선보인다.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다. 그것은 비극을 내면화하여 삶의 굳건한 의지로 치환해 내는 과정이자,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띄우는 가장 치열하고 아름다운 기록이다. 이제 딸아이의 꿈은 엄마의 꿈이 됐다. 그렇게 꿈은 환생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