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카에 혼을 담은 천재 `엔조 페라리`
스포츠카에 혼을 담은 천재 `엔조 페라리`
  • 북데일리
  • 승인 2005.07.21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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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내에서는 엔조 페라리가 역대 자동차 최고 판매액인 15억원에 팔려 화제가 됐다. 이처럼 페라리는 고급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인식돼 있다. 그런데 페라리의 창시자 엔조 페라리는 정작 고급 스포츠카를 만들 욕심은 없었다. 그는 오직 스피드만을 사랑했다.

19일 방송된 히스토리 채널 ‘스피드를 향한 집념, 페라리’를 방송했다. 방송은 페라리의 전 생애를 다뤘다. 그의 인생을 관통했던 것은 역시 차였다. 특히 그는 자동차 경주 대회에 전력투구했다. 1920년 페라리는 자동차 경주 대회 선수로 참여했고 이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다.

1929년에는 "스쿠레티아(마구간) 페라리"라는 경주용 자동차 회사를 차리고 레이서와 페라리 규격의 경주용 차 제작을 시작했다.

2차 대전 때 잠시 주춤했던 자동차 경주가 전후 다시 활기를 띠었다. 페라리는 1947년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인 최초의 경주용 차 "테포 125"를 레이스에 투입했하지만 연료펌프 고장으로 우승에 실패했다. 페라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의 결함을 해결해 그 후 모든 경주를 석권했다. 이때부터 페라리가 출전시킨 차들은 경주대회를 휩쓸었다.

하지만 페라리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7년 자동차 경주 도중 페라리의 차가 구경 나온 아이들과 어른들을 쳤던 것. 그 사고로 아이 5명 어른 10명이 사망했다. 엔조 페라리는 "살인죄"로 기소돼 4년 여에 걸친 재판을 받았다.

살인죄는 기각됐지만 196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대회에서 페라리의 차가 또 사고를 내 운전자를 포함 15명이 사망했다. 여기다 당시 미국의 포드사가 페라리를 능가할 경주용 차를 개발해 우승을 독점했던 페라리의 아성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결국 페라리는 파산지경에 이르고 만다. 1969년 페라리는 자신의 모든 사업을 경쟁사인 피아트사에 넘긴다. 페라리 전성시대가 끝난 것이다. 페라리는 승용차 부분은 피아트에 넘기고 경주용 차 제작과 경주 참가활동 운영은 71세인 페라리가 맡았다. 오로지 자동차 스피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로서는 홀가분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 페라리는 스포츠카의 명성을 지켜왔다. 1947년부터 1988년까지 40년 동안 페라리의 차와 레이싱 팀은 전 세계 카 레이스에서 5천 번이나 우승했다. 또한 그가 키운 평생을 투자한 카레이싱은 현재 수십억 달러를 움직이는 사업으로 성장했다.

`서해컬처북스` 시리즈로 출간된 `천재의 방식, 스프레차투라`(2003. 서해문집)는 페라리를 `세계 문명에 공헌한 이탈리아의 역사상 천재들 50인`에 선정했다. 지난 세계사 속에서 최초로, 가장 뛰어나게 또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인들에 초점을 맞춘 것.

제49장 `페라리, 완벽을 향해 달린다`에서 페라리는 스포츠카의 일대 혁신을 몰고 온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스프레차투라`에 대해 "어려운 일들을 아주 쉬운 척 세련되고 우아하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정신은 이탈리아의 오랜 장인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갖춘 디자인들 속에 지금도 뚜렷이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스프레차투라를 구사했던 이탈리아의 천재들은 항상 실제적이며 현실적이었고 형태, 조화, 수준의 뛰어남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엄청난 집중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페라리는 1988년 노환으로 90세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해 페라리의 90%의 지분이 피아트사로 넘어갔다. 하지만 페라리 자동차회사는 스포츠카에 대한 탁월한 기술력 덕분에 지금도 별도의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자동차팬들 또한 페라리에 다른 이름이 붙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페라리의 `스프레차투라`는 아직도 유효하다. [북데일리 진정근 기자]gagora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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