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에선 어떤 소리가 나니?
검정색에선 어떤 소리가 나니?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2.03.12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각장애 부모의 귀가 되었던 소년

[북데일리] '나의 첫 언어는 수화였다.(...) 한쪽 발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세계, 곧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묵의 세계에 있었고 다른 한 발은 내가 속한, 소리를 듣는 이들의 더 큰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p21)

소리를 듣는 아이와 청각장애를 지닌 부모 이야기 <아버지의 손>(연암서가. 2012)의 첫 대목이다. 저자 마이런 얼버그가 실제 주인공이다.

'귀머거리'인데다 '주위의 도움 없이는 살기 힘들며' 틀림없이 '사기를 당할' 것이라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었던 미국의 대공황 시기. 아버지는 ‘뉴욕 데일리 뉴스’에 식자공으로 취직한다. 엄청난 소음을 뿜어내는 윤전기와 식자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온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다음 마치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꼭 끌어안았다. (...) 아버지의 얼굴엔 새삼 놀란 듯한,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읽혀졌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나를 꼭 감싸는 아버지의 체온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체온의 언어였다.‘(p72)

아버지는 색깔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분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검정색에서 어떤 소리가 나냐니까?”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천둥소리가 울렸다. “천둥소리 비슷하게 나요.” 나는 두 주먹을 연거푸 맞부딪치는 수화로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해서는 알 수가 없어.” 아버지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일그러졌다.
“천둥은 어떤 소리가 나는데?” 나는 비에 흠뻑 젖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망치소리 비슷해요.” 나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망치를 쥔 듯 오른손을 힘껏 올려서 주먹 쥔 왼손에 내리쳤다. 아버지는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
“얼굴에 바람이 부딪치는 게 느껴지는구나. 바람은 어떤 소리가 나니?” 아버지가 물었다.‘(p.173)

“파도는 어떤 소리가 나니?“
“파도는 백사장에 부딪치면서 젖은 소리가 나요.”
“어떻게 젖은 소리? 거친 강물에? 아니면 이슬비에? 눈물에?” 난감했다.(...)
“파도는 십억 개의 물방울이 백사장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내거든요. 그런데 그 물방울들 소리가 모두 합쳐지면서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요. 그러니까 젖은 바다가 모래를 때리면서 내는 소리죠.”

내 말이 끝나자 아버지가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춘 다음 손으로 말했다. “고맙다. 이제 좀 알 것 같구나.” (p180~p181)

항상 따듯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여섯 살부터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부모의 귀와 입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장애인인 아버지를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했다. 아이로서 어른의 역할을 감당하며 힘든 일, 수치심을 느낄 일도 많았다. 설상가상 동생은 간질에 걸려 그를 보살피는 일도 어린 저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그 누구보다 끔찍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심으로 전해주는 따듯한 가족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준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