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뱅크-6] 이문열의 '타오르는 추억'
[스토리뱅크-6] 이문열의 '타오르는 추억'
  • 김현태기자
  • 승인 2011.12.12 2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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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뱅크]는 디지털 콘텐츠의 핵심인 문학 속의 '스토리'를 요약한 코너입니다.-편집자주

[북데일리] [스토리뱅크] 적, 나는 유난히 기억력이 좋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혼란스럽고 의아한 것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죽음 또한 그랬다. 나에게는 ‘학의 승천’으로 보였던 것이 동네 사람들의 눈에는 총상을 입은 시체로 여겨지는 것 따위였다.

미심쩍어하며 조용히 넘어갔던 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 다음 포기하도록 강요된 기억도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어른들이 항상 둘씩 붙어 있었는데 어느새 각기 떨어져 살게 된 걸로 보였다. 사람들에게 그걸 물어보면 당황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는 게 이상했다.

또 하나는 문둥이에 대한 거였다. 산 빨갱이들이 없어지자 우리 마을 부근에는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는 문둥이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보리밭 고랑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헌 원두막에 올라가서 문둥이가 어린 처녀 아이(은님)를 잡아다 놓고 간을 파먹는 장면을 보았다. 은님이는 괴로운지 몸을 비틀며 신음하고 있었는데 반나마 벗겨진 가슴께 에는 정말로 피가 벌겋게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놀라서 원두막에서 내려오다 떨어졌다. 그때 문둥이는 나를 잡아서 이 얘기를 남에게 하면 간을 빼먹겠다고 위협했다.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장터에서 은님이 일을 본대로 얘기하자 마을 청년들이 귀를 세워 들었다. 그 일로 은님은 놀림감이 되었다. 사흘쯤 지난 뒤 집에 어느 노파가 와서 다짜고짜 내 입가가 터지도록 찢어 놓았다. 은님의 어머니였다. 이어 낫으로 협박하면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삼촌도 어머니도 그 노파를 말리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뒤 나는 두 번 다시 내가 본 것이나 기억하는 일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입이 찢어진 얼마 뒤 간을 뽑히고 이듬해 피를 한 말이나 쏟고 죽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 천덕꾸러기에 자폐증, 무력감에 빠졌다. 학교 공부는 첫째, 둘째에서 3학년부터 곤두박질을 해 꼴찌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나의 기억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어떤 답도 쓸 수도 남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열네 살의 나이로 그 마을을 등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산빨갱이’었다는 사실. 이에 더해 삼촌으로부터 아버지가 죽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난 이후였다. 나는 마을을 떠난 뒤 구걸, 고아원, 도망, 구두닦이, 버스 차장, 트럭 조수 등을 거치며 어른이 되었다. 그러다 모든 기억과 달리 믿을 수 있는 ‘기계’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조금씩 발전했다. 결국 불도저를 몰게 되었다.

이후 결혼으로 나는 삶의 의욕을 갖게 되었다. 결혼 상대는 이발소의 아가씨였다. 그 당시의 유행대로 중동 취업을 했고,. 일 년을 뼈 빠지게 일하며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아내에게 송금했다. 일 년을 더 일하고 돌아오니 아내는 전세 돈까지 빼내 종적을 감춘 뒤였다. 처형은 아내가 핏덩이 같은 남매를 맡기고 나간 지 한 달이라며 아이들만 내밀었다.

두 달의 수소문 끝에 찾아낸 아내는 어떤 놈팡이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아내는 내 설득에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이에 더해 오랜 내 상처를 후벼대기 시작했다. 고아, 가난, 희망 없는 직업 따위.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까지. 나는 아내를 죽였다.

어렸을 때 포기를 강요당했던 기억들을 증명하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그들은 나를 비웃기도 하고 마음대로 생각하라 하기도 했다. 그들을 찾아 낱낱이 ‘기억의 흔적’을 밝혀야 했다. 하지만 그 행로는 너무 빨리 끝이 났다. 경찰들은 너무 일찍 찾아왔고, 찾아야 할 많은 것은 여전히 타오르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불안하게 처절하게, 헛되이 타오르는.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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