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통=독자의 행복
작가의 고통=독자의 행복
  • 북데일리
  • 승인 2008.01.2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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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하도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소설’이라는 김윤식 선생의 소개 글에 고개를 깊이 끄덕이기 위해서는 이청준의 신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열림원. 2007) 의 첫 페이지만 읽어도 충분하다. 외려 멀쩡하던 우리 눈이 뿌옇게 흐려지며 삶의 비애가 아득하게 펼쳐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가지 끝에 달리는 열매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우리가 이청준의 소설을 통해 삶의 뿌리를 찾아간다. 우리가 그토록 혹사시켰던 뿌리, 지금의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준 뿌리는 알고 보면 과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뜨겁게 살아있는 현재였다. 참회록을 쓸 진저, 우리의 반쪽 현재여.

소설집에는 냉혹한 역사에 휘말려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의 이야기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태평양 항로의 문주란 설화>를 비롯하여, 그리움의 미학을 신화의 힘으로 증폭시키는 <천년의 돛배>, 그리고 예술가로서 그려내고 싶은 궁극의 경지를 표현한 <조물주의 그림>등 7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또한 ‘에세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씌어진 짧고 재미있는 이야기 4편도 선물처럼 실려 있다. 이것은 거장 소설가의 회고록 성격도 띠거니와, 소설이 어떻게 우리 삶의 진실들을 해석하고 예언하는지, 우리가 왜 소설이라는 더운 물에 우리 영혼을 씻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1. 역사의 물결에 뿌리 채 떠내려간 사람들 -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온 나라가 월드컵응원으로 들떠 있던 2002년, 유재승 씨는 어릴 적 일제침략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학문을 배우러 소련으로 건너갔던 친형 일승 씨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형 일승 씨는 소련에 건너 간지 얼마 안 되어 한인 집단속에 섞여 우즈베크 강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고, 갖은 고생 끝에 정부의 농기계 기술 지도원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 과정에서 일승 씨는 조국을 두 번씩이나 잊어야 했다. 첫 번째는 소련과 우즈베크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였고, 두 번째는 전쟁으로 피 흘리는 조국을 용서하기 위해서였다. 용서하기 위해 잊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국땅을 떠도는 그들에게 ‘완전히 잊고 싶은‘ 상처를 계속 남겨왔던 것이다.

동생은 형 일승 씨에게 위대해진 조국을 보여주며 위로를 하고 싶었으나, 일승 씨는 다시 조국을 잊기로 한다. 우즈베크에서 거짓의 혁명적 외침과 함께 낭비해온 자신의 삶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새로 자라난 뿌리이고, 그 뿌리를 또 자를 수는 없었을 터이다.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을 다시 읽었는데, 그럴수록 인간의 쓸쓸한 영혼을 매만지는 작가의 깊은 고뇌가 우러나오면서 소설읽기의 참 맛을 느낀다. 과연 영상으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소설만의 극도로 절제된 표현력으로 우리역사가 가진 비애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2. 한 맺힌 개인사들을 감싸주는 신화의 온기 - 천년의 돛배

논리와 이성을 앞세우고 신화를 잃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산다. 훌륭한 의사는 뛰어난 의술과 더불어 따뜻한 치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듯 민족과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논리적 이성적 접근과 더불어, 인간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이야기 곧 신화도 있어야한다.

단편 <천년의 돛배>는 놓쳐서는 안 될 소설미학의 결정체다.

산밭 일을 나가는 어미를 따라 놀러 나온 아이는 앞바다 저 너머에 매일같이 한자리에만 머물러있는 배를 본다. 어미는 돌로 만들어져 움직일 수 없는 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아이는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다가, 커서는 그저 하나의 돌섬이었던 그곳으로 가본다. 오래된 이야기는 아이의 어미 혹은 동네사람들 모두의 염원 자체였고, 아이는 그 신화를 돌배처럼 무거운 자신의 삶을 끌어가는 동력으로 삼는다.

3. 역사와 신화의 어우러짐 속에 완성되는 작품 - 조물주의 그림

소설가인 ‘나’는 당대의 거장 영화감독 Y와 바다낚시를 가서 자기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풍경에 취한다. 그렇게 좋으면 찍으면 될 일을, Y감독은 조물주가 연출한 완벽한 작품 앞에 함부로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가 진정 담고 싶은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Y감독의 어린시절 옆집 누나가 보았던 ‘만물의 섭리자와 인간들의 합작품’ 이었다. 전쟁 통에 휩쓸려 마을사람들이 산속으로 도망치는데, 이 누나 혼자서 무리에서 떨어져 숨어 있다가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불타는 광경을 목도한다. 어쩌면 섭리자도 몸서리쳤을 그 비극의 완성을 나는 268쪽에서 선명한 영상으로 읽었다. “검게 탄 나무 둥지 속에 숨었던 불씨들이 어둠 속에서 이글이글 벌겋게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거야 ...... 검은 나무기둥의 불길들 사이로 함께 불붙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의 붉은 햇덩이와 함께”

이 아픈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Y감독은 영상으로 담기 위해 많은 영화를 찍어왔다. 그리고 남은 생애에도 씻김과 치유의 신화로 감싸기 위해 감독 일을 놓지 못할 것이다. 사실 Y감독의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는 자기 문학의 목적지를 말하고 있다.

끔찍한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 작가의 마음속에서 하도 주먹질을 해대므로,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작가의 고통이 있다. 그리고 내 존재의 뿌리의 이야기들을 가슴 졸이며 읽어가는 독자의 행복이 있다.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양자의 고통과 행복이 만나 부둥켜안고 운다. 후련해질 때까지 통곡한다. 소설은 시대와 사람을 끌어다 화해시키며 같이 먹고 마시고 춤을 추게 한다. 그의 소설은 축제이다.

오래된 것이 뿌리가 아니다. 뿌리란 현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을 일컬음이다. 우리는 마침내 이청준의 문학을 통하여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러스트 - jeje)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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