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 죽었다 살아난 <백만장자 라면왕>
세번 죽었다 살아난 <백만장자 라면왕>
  • 북데일리
  • 승인 2005.06.21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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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탔다. 그것도 장장 72시간에 걸친 기나긴 비행이었다.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방콕에서 중간 기착을 하게 되었는데, 사원구경을 하다가 그만 갈아타는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망연자실… 그런데 잠시 후 들려온 소식은 이랬다.

"방금 전출발한 비행기가 추락해서 탑 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 장면 2

때는 한국전쟁 무렵. 집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기온이 떨어지는 밤이 되면 따뜻한 곳을 찾아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 중가장 안락하고 추위를 피하는데 안성마춤인 곳은 미군부대 옆 쓰레기장이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 움푹 파인 곳에서 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주위가 너무 뜨거워서 잠을 깨보니 미군이 쓰레기를 소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만 더 늦 게 잠에서 깼더라면 `통구이`가 될 뻔했던 순간이었다.

# 장면 3

장마로 엄청나게 물이 불어난 임진강변. 집어삼킬 듯한 물살이었지만 어린 꼬마들의 머릿속에는 건너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옷을 벗고 구두통을 머리에 이고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물살이 셌지만 그래도 해볼만하다고 느끼는 순간, 엄청 나게 큰 힘이 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후 기억이 없다.

얼마쯤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눈을 떴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벌거벗은 채로 무작정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서 걸어오는 미군병사를 만났다. 비로소 `살아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노르웨이의 라면왕` 이철호씨. 그는 이런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수상보다 인기 있는 사업가가 되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그의 인생을 보면, 삶이 얼마나 다양한 기회와 우연의 연속인지 알 것이다.

②<더러운 대한민국> 다신 안오겠다!

1954년 노르웨이에 도착한 첫 번째 한국인 이철호씨. 그는 "노르웨이와 한국이 전쟁을 벌이면 어느 편을 들겠느냐?" 라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자살하겠다"라 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노르웨이는 또하나의 조국인 셈이다. 그런데 대체 왜 열일곱의 나이에 홀로한국인도 하나 없는 노르웨이에 가게 되었을까.

1937년 천안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철호씨는 임진강에 빠지던 날 만난 미군 병사와의 인연으로 미군부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군들 구두도 닦아주고 방 청소도 해주는 `하우스보이`로 나선 것. 서글서글한 외모에 미군들을 잘따라 미군들 내에서는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미군과 함께 속초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 전에도 폭격은 여러 번 맞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막 근처에 떨어져 몇명이 죽고 이철호씨도 파편을 맞아 다리를 절게 된 것. 물론 그것도 몇번의 수 술을 거친 후였다.

그나마 미군 내에서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치료도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미국 군인신문`에 부상당한 한국소년을 도와달 라는 광고를 싣게되었고 독일, 노르웨이 등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내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타기로 하고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전날 준비해 두었던 옷을 몽땅 도둑맞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거지차림으로 공항에 도착, 비행기를 타려하자 군인들이 믿지않고 대신 흠짓 두들겨 주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가까스로 비행기는 탈 수있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더러운 대한민국,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라고 소리치며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도 만만치 않은 고생길이 열리게 되는데…

③성공신화 뒤의 <퉁퉁 불은 빵>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말이다. 아마도 이철호씨는 이 말을 절감했을 것이다. 말도 안통하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게다가 몸까지불편한 상태로 홀로 젊은 시절을 보냈으니 그 고생의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터.

다행스럽게도 언어 감각이 뛰어나 노르웨이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어보다 더 어려운 노르웨이 말을 마스터할 수 있게 됐다. 그나마 불편하지 않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 노르웨이에 왔을 때 꿈은 구두닦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면허증이 필요하더군요. 그래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호텔 벨보이도 하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용변 치우는 일도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이철호 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만약 누군가가 외국에 나가서 더러운 용변 치우는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 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비참하다", "뭐하러 거기까지가서 그런 일을 하나" 라고들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철호씨는 달랐다. 궁극적으로 화장실 청소만 하러 그 먼 곳까지 간 것은 아니었기에 즐겁게그 일을 할 수 있었고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다.

생활이 안정된 지금도 이철호씨는 빵을 먹을 때면 일부러 묵은 빵을 물에 불려 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이 많아지니까. 물론 가족들은 궁상 맞다고 싫어들 하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가끔씩 찾게 된다.

"돈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빵 가게에 가서 일부러 2?3일이 지난 빵을 찾았지요. 돼지 사료용으로 헐값에 파는 그빵을 사서 침대 밑에서 며칠 더 묵혀둔 후 아무도 보지 않는 밤시간에 몰래꺼내서 물에 담가 불려서 먹습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나중에는 영양실조로 병원에실려가는 일까지 생기게 되 었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이철호씨.그는 `고개를 넘으면 목적지가 보인다`는 믿음으로 가난했던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다.

④마침내 <감자깎기의 달인> 되다

어렸을적 자장면이 너무 먹고싶어 이 다음에 크면 중국집 사장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정말로 한국에서 가장 큰 중국집 사장이 된 사례가 있다. 이철호씨 역시 먹고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요리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요리공부를 할 때는 호텔 주방에서 그릇을 닦으며 허드렛 일을 도왔는데 워낙 성실하게 일을 하다보니 윗사람 눈에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주방 장의 추천으로 직접 교육을 받게된다. 특유의 성실함에 본인의 노력까지 결합 해 최우수학생으로 요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노르웨이에온지 7년만에 스위스로 요리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스위스에 가서도 처음에는 바로 요리를 배우지 못하고 감자깎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요리사 지망생들이 2?3년 동안이나 계속해 서 감자를 깎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제 요리를 배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이철호씨도 처음에는 남들과 똑같이 감자만 깎다가 조금 지나서는 "어떻게 하면 좀더 효율적으로 깎을 수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아침마다 그날의 `메뉴`를 미리 확인해 그 메뉴에 맞게 감자를 잘라 가장 요리하기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 두는 일이었다. 일종의 차별화 준비 전략인 셈이었다.

전략은 그대로 적중해 요리사 한사람의사표로 공석이 된 자리를 이철호씨 가 꿰차게 되었다. 만약 노력없이 불평과 불만만 가득한 채로 감자깎는 일만 계속했다면 그런 기회가 찾아올 수 있었을까. 이철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간단합니다.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더 빨리 찾아옵니다."

얼핏 들으면 평범한 얘기 같지만 `노르웨이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Be Happy`를 읽는 독자에게 이철호씨가 주는 가슴 뭉클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⑤수상보다 더 유명해진 한국인

노르웨이 상점에서 "Mr. Lee 주세요" 하면 당연히 이철호씨의 얼굴이 그려진 라 면을 준다. 그만큼 이철호씨는 노르웨이에서 한국 라면을 알린 성공한 사업가다.

요리사가 된 후 처음에는 라면과는 상관없는 빵 공장의 책임자로 사업을 시작한 이씨는 150년 역사를 가진 유서깊은 공장의 외국인 최초 책임자로서 대성공을 거 두게 된다.

그가 강조하는 성공 비결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직원`이고 둘째는 `맛`이다. 식당은 음식과 더불어 서비스를 파는 곳이므로 친절함을 갖춘 직원은 기본이요, 또한 최고의 음식을 손님에게 내놓아야 한다는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빵공장 일도 좋았지만 다른 일을 생각하던 이철호씨는 뜬금없이 `라면`생각을 해냈다. 노르웨이에 정착한지 14년만에 한국에 돌아와 맛본 라면맛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라면을좋아할까?" 라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때마침 노르웨이를 방문한 농심 관계자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첫거래를 텄다.

바로 라면 세 박스로 말이다.

"처음에는 라면을 들고 슈퍼마켓을 돌아다녔죠. 난생 처음 라면을 보면서 걸레 같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끊임없이 라면을 들고 돌아다녔습니다. 한3년쯤 지나자 라면 봉지를 하나둘 뜯기시작하더군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했던가. 세 박스로 시작한 라면 사업이 3년만에 1,100박스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예순을 훌쩍 넘긴 라면왕 이철호씨. 손자들 재롱을 볼 나이인 그가 아직도 해보 고 싶은 남아 있을까. 이철호씨의 다음 얘기를 들어보면 그가 라면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면이 노르웨이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니까 결국에는 통하더군요. 다음 목표요? 이번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만두를 먹일 겁니다. 이미 만두공장도 짓고 있구요 "

⑥노르웨이서 200억어치 라면 판 비결

한국에서는 `라면하면 신라면` 이라는 등식이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있다.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에서는 `Mr Lee` 가 라면의 고유명사처럼 통용된다.

현재 소고 기?닭고기?매운맛 세 종류가 판매되고 있으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반라면과 컵라면 두 종류가 생산된다.

한국인이 즐겨 찾는 라면을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까지에는 역시 요리사 출신의 이철호씨의 남다른 노력이 숨어 있다.

사무실에 앉아서 주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철호씨는 직접 홍보맨이 되어 라면 시식회도 열고 아이들에게 사인도 해준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라면의 포장지도 이철호씨가 직접 그렸고, 사진도 본인이 셀프로 찍었다고 한다. 이는 라면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처음 농심에 라면을 주문할 때는 농심에서 만든 포장라면이었지만 거래를 트자 마자 이철호씨는 본인의 브랜드가 사용된 라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유 브랜드가 없이는 자신이 담긴 라면에 대한 열정을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심 측에서는 20컨테이너 이상이 되어야만 자체 브랜드가 가능하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자신감이 가득했던 그는 20컨테이너를 주문하고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매운맛은 줄이고 소금을 더 첨가해 스프 맛의 차별화를 꾀했다. 스프의 종류도 다양하게 만들어서 출시된 `Mr Lee`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빵공장 관리자로서의 사업수완을 발휘해 한꺼번에 많이 물건을 보내지 않고 조금씩 보내는 마케팅 전략을 사용해 결국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아무도 없는 이국땅에서 온갖 고생을 딛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라면 판매사업으로 연간 1,500만달러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노르 웨이의 라면왕으로 우뚝선 이철호씨.

그의 드라마틱한 성공스토리는 삶의 방 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⑦`라면왕` 이철호씨가 조국을 잊지 못하는 이유

`노르웨이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Be Happy`를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KBS 한민족 리포트` 에 그의 이야기가 방송된 후보내 온 1,000건이 넘는 편지는 그의 삶이 얼마나 진솔하고 감동적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책에는 라면왕이 되기까지 고생한 얘기며 독일인 첫 아내와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그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내기까지의 가슴 아픈 사연, 세 딸을 데리고 홀로 사는 아버지의 심정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한 6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간간히 담겨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던져준다.

한국이 싫다고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 이철호씨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문을 하고 있다.

"첫번째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 절대로 현재의 생활 수준이나 직업을 유지하려고 생각해서는 안됩 니다. 언어의 장벽도 문제가 되지만 아주 특별한 경력이나 기술이 없으면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대로 연장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민 가방을 꾸리는 순간부터 철저히 `그 나라사람`이 되라고 충고도 빠뜨리지 않는다. 외국에 가서도 한국 교회만 찾고 한국인들이 몰려있는 곳만 찾는 것은 이민생활에 하등에 도움이 되지않고 오히려 적응하는데 방해가 된다 는 것.

아무나 절에 가서 스님노릇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그들이 먹고, 생각 하고, 행동하는 대로 생활해야 이민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37년이나 노르웨이에서 생활했지만 애국심만큼은 남달랐던 라면왕 미스터 리.

한국전쟁에 참여한 노르웨이가 고마워서 30년이 넘도록 매달 참전용사모임을 주최하고, 노르웨이에 입양 온 한국어린이들을 위해협회를 만들어 한국문화 를 가르치며, 한국을 알리기위해 TV 퀴즈 프로에 협찬 상품을 보내는그를 보면서 진정한 조국애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나는 노르웨이에 살지만 여전히 내 조국의 음식을 상품으로 만들어 비즈니스를 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입니다"

이렇게 조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북데일리 제성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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