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명문장]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
[책속의 명문장]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6.18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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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중에서

[북데일리] 윤대녕의 산문집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현대문학. 2014)는 공간과 기억에 대한 책이다. 고향집을 시작으로 익숙한 공간들과 마주한다. 다음은 누구에게나 오픈된 공간 도서관에 대한 매력적인 글이다. 책과의 은밀한 대화를 듣는 듯하다.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의 도서관을 상상하게 만든다.

 ‘어둠이 내리면 도서관 내부는 조용히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었는지도 모른지만, 그즈음이 바로 유령들이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돌연 긴장한 상태가 되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거역하기 힘든 호기심에 이끌려 어두운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곤 했다.

 말해 무엇하랴만 도서관은 죽은 말言語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밤마다 유령들이 출몰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상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고 혹은 저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물로 변하게 마련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면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글은 쓰여지면서 동시에 유서가 되고 저자는 자신이 쓴 글에 배반당하며 또한 적극적으로 소외되고 타자화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운명이며 그 되풀이되는 운명의 결과로 한 권의 책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서관은 죽은 자들의 잠정적 현현으로 가득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군가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끄집어내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마침내 현현이 시작된다. 그때 귀에서 문득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주위는 일시에 적막감에 휩싸인다. 이는 특정한 누군가가 특정한 현현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205~206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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