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쓴 그림같은 블랙에세이
글로 쓴 그림같은 블랙에세이
  • 정지은 기자
  • 승인 2013.12.20 15: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주 시인 <펄프 극장>

[북데일리] 못 말리는 영혼의 자유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김경주 시인이 쓴 <펄프극장>(글항아리. 2013)은 책을 얼마나 희한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글로 그린 그림이랄까. 글로 만든 영화랄까. 시종 천방지축 활자 쇼가 펼쳐진다. 이 책에는 ‘블랙에세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19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90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세대가 겪었던 감수성을 팩션 형식으로 토해냈다. 오브제는 50여 개의 사물이다. 책에 나온 산문과 시 한편을 소개한다.

민들레는 바람풀이다. 바람풀은 바람의 높이까지 자라는 꽃이다. 바람의 높이는 어디일까,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바람은 자신의 높이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바람의 높이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시선이다. 인간의 시선은 바람의 높이를 드나들지만, 바람의 시선은 인간의 시선을 드나들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조물조물 풀똥을 누면서 흔들린다. 131쪽

세상에는 의외로 빨리 자라는 게 많다 / 콩나물도 빨리 자란다 / 감자잎도 빨리 자란다 / 땡깡도 빨리 자란다 / 신경질도 빨리 자란다

하지만 그중에 최고는 코털이다 / 코털은 의의로 빨리 자란다 / 아무도 모르게 자라서 콧구멍 속에서 숨쉬는 쥐새끼처럼 쥐꼬리를 내놓고 이리저리 흔든다

숨 쉬는 쥐새끼처럼 / 콧구멍 속에서 코털은 / 따뜻하게 / 숨 쉰다

애인이 내 삐져나온 코털을 못 알아봤으면 좋겠다 / 하지만 애인이 코털을 알아본다고 해도 / 절대 다른 여자 앞에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살짝 문자메시지로 알려주면 좋겠다 

코털은 의의로 빨리 자란다 / 너를 좋아하는 마음만큼 응큼하게 / 너를 미워하는 마음만큼  뽀족하게

나는 코털이 삐져나온 애인을 갖고 싶다 / 내가 사랑하는 애인들은 코털이 많았다 / 누워서 자라는 콩나물처럼 / 나는 딴청을 피우고 / 살고 싶다

코털은 의외로 빨리 자라니까

-미발표시 ‘코털은 의의로 빨리 자란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