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아름다운 시가 되다
슬픔, 아름다운 시가 되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6.04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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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하의 <눈사람의 사회>

[북데일리] 박시하의 <눈사람의 사회>(2012. 문예중앙)엔 슬픔이 가득하다.  그 슬픔은 더이상의 슬픔이 아니다. 그러니까 슬픔을 초월한 슬픔이며, 새롭게 태어난 슬픔이다. ‘슬픔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싶은 시집이다.

 누군가 내 검은 우산을 자기 우산과 바꾸어갔다 / 그러자 다른 검은 우산이 나를 따라 나온다 / 비슷비슷한 역사를 가진 우산들 / 부풀고 젖고 캄캄한 곡선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나간다 // 우산의 세부는 같지 않다 / 손잡이의 옆얼굴과 살의 휘어진 정도 / 묶였을 때의 저항력과 비를 맞이하는 탄력도 다르다 / 다르지만 결국, 같다 /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 / 어쩌면 그들의 종말도 멋지게 같다 // 비는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 이것이 비의 정체성인가 / 전선 위의 멋진 까마귀들도 언제부턴가 울지 않는다 / 이것이 울음의 역사인가 / 역사의 정체성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 어떤 정체성의 역사인가 // 검은 우산들이 펼쳐졌다가 접히기를 조용히 반복한다 / 그들은 매우 조용하지만 / 끝내주게 다이내믹하기도 하다 / 까마귀와 전봇대 / 통치와 치통 / 열린 무덤과 녹아내린 이름들 // 결국, 우리는 멋지게 / 둥글어진다 /커다란 검은 우산 밑에서 (‘검은 우산 밑에서’ 전문,32~33쪽)

 살면서 누구나 느꼈을 슬픔과 상실의 감정을 우산에 대입한다. 우산은 슬픔이면서 슬픔이 아니다. 시인은 당신과 나의 슬픔을 달래려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슬픔을 말할 뿐이다. 저마다의 슬픔은 어떤 과정을 통과하면 어느 순간 멋지게 둥글어진다는 시구처럼 날카롭지 않고 둥글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을 견뎌내는지도 모른다.

 슬픔 없는 참혹이 사거리에 서 있다 / 어제의 모래 기둥을 껴안는다 / 버스가 시립병원 앞에 선다 / 슬픔이 노선을 벗어난다 / 바퀴가 쿨럭쿨럭 공회전 할 때 / 사랑이 사라지며 나타난다 / 죽은 혁명의 살점이 오늘의 다리 사이로 떨어진다 / ‘아직도’ 라며 사이렌이 울린다 / 순간마다 영원을 던진다 / 내일 위에 머리카락을 뿌린다 / 마른 눈꺼풀을 가진 그림자를 감는다 / 서로 닮지 않은 우리들이 / 한 쌍의 눈물처럼 춤을 춘다 /내가 너의 뼈와 가죽을 가르고 / 무릎을 꺾으며 걸어 나온다 (‘삼원색’ 전문, 61쪽)

 여전히 슬픔의 뿌리를 깨내지 못하고, 슬픔의 줄기는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나 존재하는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았다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울적하고 서글픈 시다. 하지만 박시하는 슬픔을 통해 아름다움과 희망을 말하다.

 각이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굴러갈 수가 없습니다 / 마주 보고 있지만 악수를 청하지는 않습니다 // 그런데도 웃거나 울고 있다면, 그건 / 첫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나 / 이별의 습관 때문입니다 / 어떤 기분일 뿐입니다 // 춤을 추면 굴러갈 수 있다구요? /그럼, 눈 오는 날 하얀 새들은 길을 잃어버릴까요? / 새들은 어디서 밤새 녹아내리나요? /한쪽 눈썹은 원래 그렇게 우스웠나요? / 코가 비뚤어진 건 내 탓이 아닙니다 // 줄줄 / 심장이, 결국, 흘러내렸나요? // 몸이 둥근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넘어집니다 / 우리는 더욱 조용히 웃고 / 펑펑, 희미하게 웁니다 / 눈 내리는 창 너머에서 / 누군가 새 눈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 바닥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눈사람의 사회’ 전문, 62~63쪽)

 표제작 <눈사람의 사회>에서 그런 믿음을 본다. 비뚤어진 코, 우습게 그려진 눈썹, 결국 심장까지 녹아버린 눈사람을 누군가 다시 만들어 내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눈사람의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라는 눈사람과 ‘당신’이라는 눈사람이 사는 세상도 그리 될 것이다. 울음 대신 조용하고 환한 웃음으로 태어나는 눈사람들처럼.

 어디에나 슬픔은 존재한다. 그러나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시가 있다는 걸, 슬픔이 돌고 돌아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슬픔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다른 무언가로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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