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가 녹아버릴듯 한` 사랑의 여운
`뼈가 녹아버릴듯 한` 사랑의 여운
  • 북데일리
  • 승인 2005.12.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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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이사를 자주 다니는거야?

소코와 엄마는 하느님의 보트를 탔거든."

텅빈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수업중인 교실에서 간간히 풍금소리가 들렸다.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것만 같았고, 엄마손에 이끌려 낯선 교무실로 향하는 기분은 그 하늘만큼 우울하였다. `자기소개` 하는 것을 무지 싫어하는 나는, 전학 할 때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길 바랬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하느님의 보트>(자유문학사, 2003)는 `요코`와 딸 `소코`의 17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그리고 있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모녀가 번갈아 이야기하는 독특한 소설 전개와 섬세한 필치로 어쩌면 너무도 사소하여 놓치기 쉬운 일상의 모습들을 `소름이 끼칠만큼` 상세히 들려주고 있다.

이미 아내가 있던 `그 사람`은 요코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다. `뼈가 녹아버릴듯한` 그 사람과의 사랑은 딸 소코를 남겼다. 딸의 존재는 요코의 인생을 통틀어 `피아노`와 `그 사람`에 이은 세번째 보물이다.

이혼하자는 요코의 말에 피아노 은사이자 남편인 모모이는 가슴 아파한다.

"가지고 가. 비밀번호는 모두 당신의 생일이니까."

부도덕한 아내를 욕하기는 커녕 오히려 현금카드를 몽땅 내미는 모모이. 남편에게 `뼈가 녹아버릴듯한 아픔`만 남긴 채 요코는 세상 빛을 본 지 6개월된 소코를 안고 도쿄를 떠난다.

"반드시 돌아올게.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도 당신을 찾아 낼거야. 당신이 어디에 있든."

"아빠의 약속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이미 지켜진 거야."

`지고지순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요코의 사랑. <하느님의 보트>는 작가 스스로도 `사랑의 광기를 다룬 위험한 작품`이라 평가한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며 모녀의 유랑생활도 어느덧 17년에 접어든다. 요코는 늘 `지나간 일은 상자속에 넣으면 된다`고 말한다. 필요할 때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다는 나름의 편한 논리. 하지만, 긴 유랑에 지친 소코는 달랐다.

`어딘가에 익숙해지면 아빠를 만날수 없을 것 같아서` 자꾸만 이사를 고집하는 엄마에게, 소코는 이제는 친구들과 상자 속이 아닌 현실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미안해. 엄마의 세계에서 계속 살지 못해서."

하느님은 줄곧 마음속에 존재해 왔다. 어디로 이사가든 요코에게 그 곳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의 일부였다. 코튼캔디색으로 물들인 요코의 인생은 피아노와 `그 사람`을 만난 후부터 제 빛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종교가 되어버린 사랑은 17년간 아이까지 힘든 유랑을 요구했지만 요코에겐 어쩌면 그 사람을 찾아가는 기분좋은 여정이 아닐까.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보트 위에서 `상자`와 가슴시린 사랑의 추억마저 없었더라면 요코는 진작 생명의 끈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코는 자문한다.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과 반드시 만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걸까. `그 사람과 꼭 닮은 소코가 기숙사로 떠난 후 요코는 허무감에 한기마저 느끼며 도쿄로 돌아온다.

<하느님의 보트>는 조용한 소설이다. 엄마와 딸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전하는 일상은 처음에는 담백하다 못해 다소 지루함마저 고개를 든다. 그 지루함은 자칫 염세주의니, 어줍잖은 로맨티스트이니, `엄마 자격도 없는 미친 여자를 다룬 소설`이라는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실망하기 전에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를 떠올려 보자.

[북게릴라 1기 손영주] saverina@nate.com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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